[김영인 칼럼] 귀하신 돈, 모시는 돈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입력일 2014-10-23 16:00 수정일 2014-10-23 16:00 발행일 2014-10-23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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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인-논설위원
김영인 논설위원
한 세기 전, 서양 할머니 이사벨라 비숍은 우리나라를 여행하면서 애를 먹어야 했다. 돈 때문이었다. 

“한국의 화폐가치는 명목상 달러당 3200푼에 달했다. 동전은 밀짚 끈에 수백 개씩 꿰어져 있는데 그것을 세는 것, 운반하는 것, 값을 지불하는 것이 모두 성가신 일이었다. 일본돈 100엔을 현금으로 운반하는데 사람 6명 또는 조랑말 한 마리가 필요했다.…”

당시 100엔은 영국 돈 10파운드였다. 그 별로 많지도 않은 돈을 운반하기 위해 말 한 마리를 구해야 했던 것이다.

환전을 하지 않고 외국돈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외국돈은 서울과 ‘조약항’에서만 통용되었다. 은행이나 환전상 따위는 물론 없었다. 무거운 ‘엽전’을 짊어지거나, 아니면 말에 싣고 다니며 써야 했다.

비숍 할머니는 말 한 마리에 가득 실은 돈과 함께, 무게 7.3kg이나 되는 카메라를 비롯한 여러 가지 ‘귀중품’을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도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대문도 잠기지 않고, 자물쇠도 없는 방에서 아무런 불안감 없이 네 활개를 뻗고 누워서 잘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도둑도, 강도도 없는 좋은 나라였다.

어쨌거나 외국돈은 ‘귀하신 돈’이었다. 사람이 걷는데, 돈은 말을 타고 다닐 정도였다.

‘높으신 돈’도 있었다. 일제 때 일본 동전에는 이른바 ‘황실’ 문양인 국화 무늬가 찍혀 있었다고 한다. ‘철없는’ 아이들이 이 돈을 가지고 가끔 ‘동전치기’를 놀았다. 동전을 땅에 늘어놓고 돌을 던져 맞혀서 따먹는 놀이였다.

일본 ‘순사’들은 기겁했다. 감히 ‘황실’의 상징이 새겨진 높으신 돈을 향해 돌을 던질 수는 없었다. 자기들의 ‘천황’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순사들은 동전치기를 단속했다. 적발되면 아이들을 혼내고, 부모까지 호출해서 따귀를 때리며 시말서를 쓰도록 했다. 그랬으니 일본 동전은 ‘큰절’이라도 바쳐야 할 만큼 높으신 돈이었다.

오늘날에는 ‘모시는 돈’이 생기고 있다. 서울시가 상습 고액체납자를 ‘가택수사’했더니, 5만 원짜리 뭉칫돈이 빳빳하게 발견되고 있다. 5만 원짜리 고액권은 ‘납세의 의무’까지 접으면서 곱게 모셔두는 돈이 되고 있다.

돈이 돌지 않으면 더 이상 돈일 수 없다.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돈은 돈이 아니다. 5만 원짜리 돈을 꼭 찍어야 한다고 우기던 사람들은 뭐하고 있나.

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