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인 칼럼] 정조 임금과 빅토리아 여왕

김영인 논설위원 기자
입력일 2014-09-25 16:00 수정일 2014-09-25 16:00 발행일 2014-09-25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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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인-논설위원
김영인 논설위원

‘정복자’ 나폴레옹은 음식을 먹는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당연히 소화가 잘 안 되었을 것이다.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사망한 원인도 독살이 아니라 소화불량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테이블 매너’마저 ‘빵점’이었다. 고기를 먹을 때는 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뜯었다. 뼈는 바닥에 되는 대로 내동댕이쳤다. 빵에는 소스를 듬뿍 발라서 허겁지겁 씹어 삼켰다.

나폴레옹은 요리사를 들볶기도 했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이 늦으면 욕설부터 퍼부었다. 식탁을 뒤집어엎기도 했다. 그러면 요리사는 주눅이 들어야 했다.

나폴레옹은 그렇지만 ‘황제’였다. 요리사를 달래주는 ‘테크닉’이 있었다.

“자네는 그래도 내 비위만 맞추면 되지만, 나는 국민 모두의 비위를 맞춰야 하네. 그러니 내가 자네보다 더 힘들지. 자네가 나보다 훨씬 나은 거야.”

나폴레옹은 이렇게 국민 무서운 것도 알고 있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64년 동안 ‘장기집권’했다. 그러면서도 독일 출신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바람에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는 여왕이다.

어떤 장관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맥주세’를 올리자고 건의했다. 국가의 재정 수입을 늘리자는 건의였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되레 날벼락이 떨어졌다.

“나더러 내 백성의 맥주를 빼앗으라는 말인가!”

호되게 당한 장관은 목을 움츠리며 엎드려야 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처럼 백성을 생각했다. 백성을 아낀 여왕은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세계를 손아귀에 쥐고 떵떵거렸다.

우리에게도 어진 임금 정조가 있었다.

정조 임금 때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다. 정조는 백성의 고통을 감안, 세금을 낮춰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반대했다. 국가 재정이 걱정스럽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정조는 단호했다.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고(國依於民),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는 것이다(民依於國). 그리고, 백성이 있은 뒤에야 나라가 있다(有民然後方有國).”

정조는 그러면서 신하들의 반대를 일축했던 것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김영인 논설위원 kimyi@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