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티브 시니어] 3·26 뚝섬만세운동을 아시나요

김충수 명예기자
입력일 2021-03-04 15:27 수정일 2021-03-04 15:28 발행일 2021-03-05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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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 만세운동 기념비 건립
뚝섬 만세운동 기념비=김충수기자
서울 성동구가 올해 건립한 뚝섬만세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뚝도리의 민중들이 이곳에서 자주독립의 함성을 울리다. 님들이 있어 우리의 민주주의 독립 국가는 현실이 되어갔습니다. 님들이여 용기와 희생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뚝섬만세운동 기념비에 새겨진 글)’

서울 성동구는 지난 1일 삼일절을 맞아 성수동 뚝섬문화공원에서 뚝섬 만세운동 기념비 건립행사를 가졌다. 역사적 자료에 의해 발견된 1919년 3월26일 뚝섬 일대에 있었던 뚝섬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고 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취지에서다.

뚝섬만세운동 기념비 건립은 2013년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사업으로 진행한 ‘성동지역 근현대사 찾기 사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구는 성동역사문화연구회와 함께 당시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 주민으로 부터 뚝섬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일제 강점기 당시 뚝섬에 우체국 관사, 지주 집 등 많은 역사적 사료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성동역사문화연구회는 뚝섬만세운동의 발자취를 찾고자 독립유공자 후손을 만나 관련된 내용을 확인하고 2016년 ‘뚝섬 삼일운동’이라는 자료집을 발간했다.

뚝섬만세운동은 민족대표나 학생층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의 주체가 노동자 계층으로 바뀌어가며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1919년 당시 경기 고양군은 각각 한지면과 뚝도면으로 현 왕십리와 성수동 뚝섬 일대였다. 뚝도면은 14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지금의 광진, 잠실, 면목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이었으며 성수동 지역이 바로 면사무소 소재지로 뚝도면의 중심가였다.

당시 뚝섬 일대는 서울시민을 위한 땔감의 양륙지로 뚝섬 주민들의 대부분이 뗏목에 실려 온 땔감을 싣고 내리거나 달구지나 지게로 땔감을 한양으로 옮기는 일에 종사하는 주민이 많았기에 뚝섬만세운동의 주도층은 지역 특성상 우마차꾼, 지게꾼, 달구지꾼, 짐꾼 등 노동자 민중들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뚝섬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12일과 26일 두 차례 벌어졌다.

첫 번째는 독도 간이농업학교와 독도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두 번째는 운동이 있기 며칠 전부터 유인물이 곳곳에 뿌려졌다. 유인물을 보고 모인 민중들은 26일 수탈과 탄압의 중심지인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1명 사망, 12명 부상 등 사상자가 속출하고 103명이 체포되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일본 측 오장 1명, 상등병 2명, 일본인 소방수 3명이 부상을 입었을 정도로 고양군에서 일어난 시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시위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뚝섬만세운동 기념비는 앞으로 초중고등 학생들에게 역사적 교육 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충수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