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티브 시니어] 호치민과 베트남

류제섭 명예기자
입력일 2021-01-21 14:35 수정일 2021-01-21 14:38 발행일 2021-01-22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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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
류제섭기자
류제섭 명예기자

최근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베트남 호찌민시(구 사이공시)와 정글지대를 골고루 둘러보았다. 인상 깊었던 것은 외세와 전쟁을 치를 때 구축한 지하 요새들이었다. 

2500m 깊이의 지하 땅굴에는 게릴라 사령부와 무기 재생공장, 취사장, 회의실, 3층으로 구축된 통로길 등이 요새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배수구는 사이공 강으로 흐르게 설계되었다. 이같은 치밀한 지하 요새들이 강대국인 프랑스와 미국을 차례로 물리친 군사전략적 인프라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 땅굴을 파는 도구는 오직 호미와 삼터미 자루가 전부였다. 조금씩 파놓은 버럭 흙은 조금씩 사이공 강으로 흘러 보냈다, 사이공 강물이 흙탕물이기 때문에 버럭 흙을 버려도 들킬 염려가 없었다. 일부는 버럭 흙을 집에 가지고 와서 아이들 호주머니에 넣어주면 등교 길에 조금씩 흘려 버렸다. 그들의 치밀한 땅굴파기 계획은 수십년 동안 이어졌다. 오로지 민족통일이란 염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트콩 게릴라들은 낮에는 지하에 은신해 작전을 구상하고 밤에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게릴라전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베트콩 전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공간과 도구를 돌아보면서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한 8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민족의 용맹성과 민족성에 감화를 느끼면서 그 원동력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월남전 당시 사이공은 지금 호찌민시로 변했다. 통일된 베트남은 비록 공산주의 체제지만 경제는 자본주의를 표방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약 2700개가 진출하여 베트남과 한국이 동맹국 이상의 파트너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호찌민 시내를 다니는 버스의 80% 정도는 우리나라 현대차이다. 승용차도 현대·기아차가 많다. 핸드폰은 삼성, TV와 냉장고는 LG 제품이 쫙 깔렸다.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느꼈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오늘의 베트남을 있게 한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다. 그는 바로 호찌민이다. 호찌민은 베트남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오롯이 바쳤다. 인민이 잘 살 수만 있다면 사회주의를 수정해서라도 자유경쟁의 원리와 시장경제, 사유재산 인정, 자유무역을 도입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호찌민은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결혼하면 식구들 때문에 인민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는 검소하였다. 호찌민이 죽고나서 유물로 남은 것은 낡은 책 한권(목민심서)과 자동차 타이어로 직접 만든 신발, 헌옷가지 3벌이 전부였다고 한다. 마오쩌둥을 보좌했던 중국의 정치 지도자 조우언라이가 자식도, 무덤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황하의 재로 뿌려진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반면 1950년대만 해도 아시아에서 부자나라로 행세했던 필리핀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과 부인 이멜다의 장기독재, 탐욕, 사치 등으로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지도층은 아직도 변칙 축재와 편법 상속·증여를 일삼아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호찌민을 떠올리며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류제섭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