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지배받던 英에 콧대 세운 印… 역사의 아이러니

권기철 객원기자
입력일 2021-04-26 07:00 수정일 2021-05-28 11:10 발행일 2021-04-2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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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철의 젊은 인도 스토리] 英연방 최대국가 인도 (하) 영국의 명운 쥔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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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고한 필립 공(왼쪽 네번째)이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과 함께 인도 사절단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 유튜브 캡쳐

영국이 자국 왕을 황제로 올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로마 제국의 정통성과 무관했기 때문이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황제를 자처한 제국, 예를 들어 프랑크 왕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이나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반드시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임을 자처했다.

이런 전통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이르러 깨졌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의회를 압박해 국민이 황제로 임명해주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그나마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는 신성로마제국의 건국 황제 샤를마뉴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간접적으로라도 로마의 정통성을 부여 받아 황제에 올랐다.

유럽 내 국가들이 제국이라 칭하기 위해선 로마 제국과 관련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로마와 연줄 없이도 황제를 칭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타 문화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인도 등 유럽 바깥의 타 문화권에서 황제를 칭할 경우, 유럽 국가들은 이 제국들이 로마와 인연이 없음에도 제국으로 인정해 주었다. 때문에 인도를 제국으로 만들어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해도 반감을 표시하지 못했다.

‘인도 황제’라는 자리는 아예 타 문화권 황제였기에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인도 각지 번왕국 제후들의 자치를 계속 인정했기 때문에 영국 국왕이 그들 위에 군림한다는 모양새도 갖출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인도 황제 칭호를 덧붙인 것이다.

당시 영국 빅토리아 여왕(Queen)의 장녀 빅토리아 메리 공주가 프로이센의 왕세자 프리드리히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만들게 되자 공주가 황후(Empress)가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빅토리아 공주가 독일 황후가 되면 모친인 빅토리아 영국 여왕(Queen)과 지위가 역전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자존심 상해 하던 영국인들은 인도 황제(여제)라는 칭호를 쓰는 것이 인도 통치에도 유리하고 영국 국민의 자존심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여제 칭호를 바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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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영국간 아편전쟁 모습. 아편전쟁 뿐만 아니라 1,2차 세계대전 때도 수많은 인도 군인들이 동원되어 희생되었다.

인도 제국이 세계사적으로 끼친 악명은 ‘아편’이다. 당시 인도는 아편의 주산지였다. 영국이 중국 차(茶)에 대한 거래 대금으로 아편을 중국에 퍼트리면서 아편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영국군으로 동원되어 싸운 군인들 가운데 인도인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는 중국과 인도 관계가 틀어지는 시발점이되었다.

인도인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령 인도군(British Indian Army)이라는 이름으로 서유럽 전선에서는 독일과 싸웠다. 오스만 제국과 싸웠던 갈리폴리,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전선에 투입된 대부분의 영국군도 인도군이었다.

인도 제국을 비롯한 영국의 남아시아 식민지는 1947년에 해체되었다. 인도 제국도 인도, 동서파키스탄(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실론(스리랑카)로 분할되어 각각 영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그래서 독립 초기 인도와 파키스탄 스리랑카는 한동안 모두 형식적으로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시는 왕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각국은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자치령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이 되었다. 인도는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파키스탄은 1956년에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스리랑카는 1972년에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지배국인 영국이 그래도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을 허용해서 인지는 몰라도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네 나라 모두 영연방에 가입해 있는 상태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불화 문제로 1972년 연방을 탈퇴했으나 2004년에 복귀했다. 1900년대 초반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영국이 자국과 백성을 살리려고 애를 써주는 사람들이니 사이 좋게 지내야 인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독립 투사로 알려진 간디도 1940년 이후 여러 차례 “영국은 우리와 친구이니 떠나는 친구를 잘 보내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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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 항쟁 당시 전쟁 장면. 이 전쟁 이후 인도 제국이 수립되었다.

1757년부터 1856년까지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 대부분이 조금씩 영국 지배권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다 1857년 북부 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 항쟁’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봉기가 일어나 2년 가까이 지속되다 결국 영국군에 의해 처참하게 진압되었다. 이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은 그 봉기에 가담한 자들을 무식하고 역사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로 폄하했다.

그들은 영국의 존재를 ‘비록 수탈을 하긴 하지만, 인도라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궁극적으로 필요한 근대화를 시켜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는 집단들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영국이 인도 땅에 들어왔을 때 인도의 전통과 문화는 모조리 구태로 내몰렸고, 인도가 나아가야 할 미래는 영국의 결정 앞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젊은이들이 영국이 가지고 온 근대화를 찬양했다. 영국 정부는 이런 오피니언 리더들을 규합하도록 했고 심지어 정당 설립도 도왔다. 인도 민족이 영국에게 떠나라고 한 것은 지배를 당한 지 180년 정도가 지난 1942년부터였다. 1947년에 영국인들은 떠났다.

독립 후 인도는 영연방에 주저 없이 속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 인도는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이끌고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영연방의 황제 깃발 아래 같이 놓인 형제처럼 가까운 친구 사이는 유지되었다.

인도는 독립 당시 한국처럼 독립군이나 임시정부도 없었다. 일제의 도움으로 버마에 근거지를 두고 본토 침공 시도를 하려다가 시작도 못해 본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라는 것이 있긴 했지만, 상해와 만주 일대에 존재한 헌법상의 ‘대한민국’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인들에게는 우리 역사에 존재하는 매국노도 없고, 친일파와 같은 개념도 없다. 역사 청산이라는 것도 있을 리 없다.

영국 식민 지배는 분명히 강압에 의한 것이지만, 영국인들은 여러 가지 교묘한 방식으로 인도인들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적당한 이익의 공유 관계’였다. 영국의 통치가 인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 덕분이다. 식민시대 영국에게 인도의 경제적 가치는 매우 컸다. 인도는 거대하고 안전한 상품시장이자 투자시장이었다. 1870년 인도 수입의 80%가 영국 제품이었다. 1913년에도 60%가 영국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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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머런 전 영국 총리(왼쪽 네번째)와 모디 인도 총리(왼쪽 다섯번째)가 간디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Hindu
인도는 전 세계에서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큰 영국의 수출시장이었으며 중국과의 삼각 무역에 필요한 아편의 생산기지였다. 19세기 중엽에는 아편이 인도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영국 정부는 제국 내의 모든 지역에서 자유무역을 마치 국교와 마찬가지로 신봉했지만, 인도에서만은 관세를 영국 산업에 유리하게 만들어 지배했다.

인도의 경제적 가치는 이처럼 대단한 것이었지만 진정한 가치는 사실상 ‘인도군’이었다. 인도군은 영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지닌 유럽 국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육군을 거의 보유하지 못한 영국에게 15만 명의 지상군을 공급해 주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당시 150만 명의 인도군이 참전했으며 2차 대전에서도 동원된 총 500만 명의 영국 병력 가운데 250만 명이 인도인이었다. 이 군사력은 모두 인도의 자원으로 유지되었기에 인도는 영국에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으면서 영국을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 준 셈이다.

150만명의 인도인들이 참전하고 6만 2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인도인이 전쟁 중 보인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영국은 인도인들의 지방정부 참여를 확대해 주었다. 그것은 개혁의 물꼬를 튼 조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인도의 공업화는 크게 촉진되었다.

전후 1919년에 영국이 인도에게 재정독립을 허락하자 인도는 즉각 자유무역을 포기하고 보호관세를 도입했다. 1930년대가 되면서 인도는 더 이상 영국 경제에 이익이 되지 않았다. 나아가 1933년부터 영국이 인도 주둔군의 비용을 보조하게 되자 인도는 이제 자산이 아니라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재정적 부담이 인도 독립을 촉진시켰다.

인도의 영국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2015년 과거 테러리스트라고 칭했던 간디의 동상이 런던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졌다. 우리로 따지면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진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브렉시트 이전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가장 많은 의견을 나눈 국가는 인도였다. 브렉시트 이후 가장 의지하는 나라도 인도다. 현재 영국 관광산업의 19%, 헬스케어·제약 분야의 15%, 그리고 유통(15%) 부동산(13%) 등 많은 분야를 인도 이민자들이 지배하고 있다. 수 많은 의사 및 전문직 종사자와 일반 노동자들이 인도 출신이다. 즉, 인도 없이는 영국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향후 인도의 발전과 더불어 인도에 대한 영국의 의존도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시대 영국이 인도의 미래를 결정했다면, 브렉시트 이후 2021년 현재, 인도가 영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상황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권기철 국제전문 기자 speck007@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