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뷰] 연극 ‘대신목자’…‘인간다움’에 대한 사색, 그에서 확장된 죄의식에 대하여

허미선 기자
입력일 2020-03-07 15:00 수정일 2020-03-08 07:47 발행일 2020-03-07 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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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대신목자’(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간다움’이란 생물학적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갖추게 되는 미덕이 아니다. 어쩌면 ‘미덕’이 아닐 수도 아니다. ‘인간다움’이 ‘미덕’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 중 으뜸은 ‘인간’이며 모든 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오만’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레이디 맥베스’ ‘엄마 이야기’ ‘하나코’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등으로 인간의 심연을 탐구했던 한태숙 연출이 5년만에 대본까지 쓴 신작 ‘대신목자’(3월 16~28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그 인간다움 그리고 그에 대한 사색과 고찰에서 확장된 죄의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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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대신목자’(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극 전체를 짓누르는 상실감과 죄의식, 현실의 잔인함과 이기심은 인간의 심연에 도사리고 있다. 인간과 늑대의 교감으로 발현되는 극의 심연은 변함없이 심오하고 철학적이며 을씨년스럽고 기괴하다.

여기 ‘컹수’(김도완)라 불리는 늑대가 있다. 그 늑대는 인간들의 유희를 위해 인간들에 의해 동물원 우리에 갇혔다. 그 늑대가 자신을 조롱하는 어린아이의 팔을 물어뜯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컹수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컹수를 “얘”라고 부르며 긴밀하게 교감했던 사육사 유재(전박찬)와 수사관(서이숙)이 심리를 진행하는 동안 종으로서의 늑대가 가진 본성과 폭력성, 이종간의 교감을 두고 설전이 벌어진다.

“늑대를 죽여야 한다” 들끓는 여론, 그 여론에 동물원 관계자들은 사살로 여론을 잠재워야 한다 “그래도 오래 함께 했는데 사살은 너무 하다 등 저마다의 주장을 펼친다.

유난히 긴밀했던 유재의 실수로 컹수가 탈출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풀어준 게 아니냐는 의심이 불거지고 또 다시 수사관과의 대면. 또 다시 종으로서의 인간과 늑대의 교감에 대한 설전이 이어지고 다시 한번 여론이 들끓는다.

그 여론은 이제 컹수를 일부러 풀어줬다고 의심받는 유재를 향한다. 유재를 중심으로 또 다시 펼쳐지는 갑론을박. 유재의 고의성을 밝혀내려는 수사는 그의 가족과 동료, 주변인물로 확대된다. 아이를 산에 내다 버렸던 유재의 모친(성여진), 사고로 가족을 잃고 혼자 남겨진 한진부(김은석), 유재의 고의성과 컹수에 대한 감정, 그들의 처리에 대한 의견들이 또다시 얽히고설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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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대신목자’(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 과정에는 저마다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린 데 대한 자책과 버림받은 존재들 간의 유대가 스민다. 이혼으로 꽤 오래 만나지 못했던 딸아이가 함께 찾은 동물원에서 팔을 물어뜯긴 데 대한 아버지의 미안함은 분노의 형태를 띤다.

 

산에 아이를 내다 버린 기억으로 넋을 잃은 모친은 강박적으로 애완견 ‘목자’의 안전과 울음소리를 살피고 가족을 잃은 한진부에 추파를 던지며 또 다른 관계를 갈구한다. 한진부는 그런 모친에 과거와 현실의 경계를 어정쩡하게 서성인다. 여론에 귀 기울여 컹수를 사살해야한다던 사육사 귀옥(박수진)은 여자라는 이유로 컹수 사살 작전에서 배제되면서 입장을 전환한다.

컹수에게서 유재로, 또 다시 유재에서 주변인들로 ‘갑론을박’의 대상이 확대되는 일련의 과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누구나 그 ‘갑론을박’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어쩌면 극 중 인물들은 때로는 버리고 버림 받는가 하면 때로는 관계맺기에 나서거나 혼자 남겨지는 누구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신목자
연극 ‘대신목자’(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앙상한 나뭇가지들로 뒤덮인 숲, 우리에 갇힌 듯한 취조실 등 분리된 듯 보이던 공간은 극이 진행되면서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컹수의 민가 습격 소식에 목매 ‘목자’를 부르는 모친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유재, 그의 모습에 “진짜 내 아들”이라고 안도하는 모친. 모친이 그토록 안위를 걱정하던 목자와 버림받은 기억을 안고 척박하게도 살아가는 유재의 경계 역시 모호해진다. 

극 시작 종의 분류에 따라 명확하게 달리 취급되는 듯하던 짐승 컹수와 인간 유재는 별반 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인다. 컹수처럼 사라진 유재와 컹수의 교감, 컹수의 죽음, 그 유재가 컹수와 다르지 않게 취급되는 과정을 따르는 극은 ‘한태숙다운’ 방식으로 묻는다.

인간과 인간의 교류가 반드시 ‘인간답다’ 할 수 있을까.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긴밀한 교감이 인간답지 않다 단언할 수 있을까. ‘종’으로서의 인간과 존재론적인 ‘인간’의 경계는 무엇으로 명확해지는가. 그 모호해진 경계, 다양한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떤 나로 존재하는가. 

생각의 가지들은 그 물음들로 끊임없이 또 다른 가지를 치고 변이를 일으키며 진화한다. ‘종의 기원’처럼 늑대 컹수에서 시작해 유재로, 주변인들로, 또 그들과 관계한 이들에게로, 그 확장과 변이, 진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을 통해 더 많고 깊은 사색으로 가지를 뻗친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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