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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뚜벅뚜벅 조선으로 시간여행

[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트래블레이블 '당일치기 조선여행'

입력 2024-08-16 07:00 | 신문게재 2024-08-1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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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볼 만한 유적 공간이 많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몰라 무심코 지나치거나 겉보기에 그치기 일쑤다. 이 책은 부제 ‘지식 가이드와 떠나는 한국사 600년 시간 여행’에서 보듯이, 문화유산 해설 전문여행사인 ‘트래블리이블’이 풍부한 자료 연구와 현장 답사를 기초로 독자들이 편하고 의미 있게 조선시대를 시간여행할 수 있게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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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왕실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임금이 앉던 붉은색 ‘어좌(御座)’가 있다. 뒤로는 해와 달, 5개 산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봉도’가 자리한다. 이 병풍은 임금이 궁 바깥 행차를 할 때마다 함께 했고, 임금이 승하하면 함께 묻혔다. 임금의 초상 ‘어진(御眞)’은 후대를 위해 하나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린 초상화다. 어진을 가장 많이 남긴 왕은 태조 이성계다.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사진=게티)

과학문화전시실에서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눈길을 끈다. 295개 별자리와 1467개 별을 밝기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측우기’도 있다. 1639년 이탈리아의 ‘우량계’보다 200년 앞선 발명품이다. 처음 발명한 세종 23년 음력 4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5월 19일이 발명의 날이다. 세종과 장영실이 의기투합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알람 시계 ‘자격루’도 이곳에서 위용을 자랑 한다.


◇ 경복궁

 

1395년 조선 최초의 ‘법궁(法宮)’을 창건할 때 정도전은 ‘크나 큰 복을 누리라’는 의미로 경복(景福)이라 지었다. 하지만 궁의 규모는 의외로 소박했다. ‘근정문’은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된 자리며, 그 앞 마당인 ‘조정’에 직급별 품계석이 세워졌다. 세종 때부터는 천인(賤人)을 포함해 80세 넘는 노인들을 위한 축하연도 열렸다. 90세 이상이면 관직을 수여했고, 100세가 넘은 천인은 면천(免賤)까지 해 주었다. 

 

경복궁
경복궁과 앞 마당 조정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천장에는 두 마리 용이 새겨져 있다. 경복궁에서 왕이 평상시 거처하며 신하들과 업무를 보던 편전이 ‘사정전’이다. 근정전 바로 뒤 편이다. 근정전보다는 작고 낮은 어좌가 놓여 있어, 수평적 눈 높이로 토론이 이뤄졌다. 신하들과 가장 경연을 많이 한 임금은 세종과 성종이었다. 세종은 무려 2011건에 달해, 조선왕조실록 전체에 기록된 경연 건수의 7분의 1에 달했다.


◇ 창덕궁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정종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다시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새로 지은 궁이다.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궁궐로 칭송받는다. 조선조 5개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창덕’은 선한 것은 성스러운 것이니 왕실은 백성에게 성스러운 덕을 끼쳐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전인 ‘인정전’에서 즉위한 왕이 ‘연산군’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창덕궁에서 고종은 일본의 협박으로 순종에게 강제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일본은 궁의 내부를 근대식 궁의 형색으로 갖추게 했다. 대표 전각인 ‘희정당’은 샹들리에와 각종 서양식 가구가 화려하다. 왕비의 침전 ‘대조전’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한 곳이다. 대조전 동쪽의 ‘흥복헌’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이완용 등이 순종에게 한일합병조약 문서에 강제로 옥쇄를 찍게 한 망국의 장소다.


◇종묘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태조 이성계는 법궁인 경복궁을 짓기도 전에, 선대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실 ‘종묘’ 건설부터 명했다. 그리고는 고조부부터 아버지에 해당하는 목조와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종묘의 정전은 길이 101m로 단일 건물로는 국내 건축물 중 가장 길다. 가장 왼편 방에 이성계와 2명이 부인이 있고, 그 옆으로 18개 방에 후대 왕과 왕비들이 모셔져 있다.  

 

종묘
종묘

 

조선의 역대 왕 27명 가운데 종묘에 모신 왕은 19명이다. 다른 왕들은 종묘 뒤편의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장소의 협소함 탓에, 정전에 모신지 5대가 지나면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긴다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13명은 왕조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커 절대 정전에서 빼지 못하게 했다.


◇ 창경궁

 

성대할 창(昌)에 경사 경(慶)을 쓴 궁궐이지만, 가장 어두운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일제가 한 때 동물원 ‘창경원’으로 폄하했던 곳이다. 왕실의 주거용으로 지어져 공간도 적고 화려함도 덜했다. 정전인 ‘명정전’도 조정보다 작았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었으나 창경궁은 자연 지세에 맞춰 동향으로 지어졌다. 명전전 왼편의 ‘문정전’은 1762년 7월 4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난 곳이다.

현재 창경궁은 10채의 전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1908년에 일제가 순종 위로를 명목으로 위락 시설을 지으면서 60여 채 전각이 뜯겨 나가고 동·식물원이 들어섰다. 조선왕실의 질서를 상징하는 조정 마당의 박석들까지 다 뜯겨나가고 꽃밭이 들어섰다. 그리고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누구나 출입할 수 있도록 ‘궁’을 ‘원’으로 격하시켰다. 경술국치 후에는 아예 창경궁과 종묘 사잇길까지 끊어버렸다.


◇덕수궁


본래 이름은 ‘경사가 구름처럼 몰린다’는 뜻의 경운궁(慶雲宮)이었다. 고종이 1897년에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선택한 후 1907년에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은 다른 궁에서는 볼 수 없는 황금색이 찬연하다. 당시 황금색은 중국 황제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고종 스스로 황제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화전 내부 천장의 용(龍)도 발톱이 5개인 ‘오조룡’으로 황제궁의 상징이다. 

 

덕수궁
덕수궁 전경.

 

고종의 염원이 가장 많이 담긴 공간이 ‘석조전’이다. ‘돌로 만든’ 그 자체가 ‘근대’를 상징했다. 석조전 서관은 당시에도 전시를 목적으로 했으나 일제가 ‘이왕가(李王家) 미술관’이라며 격을 낮춰 버렸다. 덕수궁 바깥 쪽에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과 순종이 즉위식을 가진 돈덕전이 있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은 두루 평온하다는 뜻이었지만, 고종은 1919년 이곳에서 원인 모를 죽음을 맞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908년 경성감옥으로 시작된 서대문형무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감옥이다. 청나라 사신과 무역상들을 맞던 번화가 ‘의주로’에 형무소를 세운 것 자체가 조선인을 통제할 목적임을 드러낸 것이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할 때까지 수 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인사들이 투옥되었다. 최대 수용인원이 500명이었으나 3.1 만세운동 때는 3000명을 넘겼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박물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진=게티)

정면의 보안과 청사 2층에는 무수한 붉은 점이 찍힌 한반도 지도 ‘전국 의병 전쟁 거의도’가 걸려 있다.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던 의병부대의 총대장 허위 의병장은 서대문형무소의 1호 사형수다. 세 방향의 옥사를 모두 감시할 수 있는 ‘판옵티콘’ 방식의 설계가 눈길을 끈다. 1918년에는 사형선고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수감을 위해 여자 옥사가 지어졌다. 이곳 8호 감방에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어 있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동관 1층 중·근세관 조선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외규장각 의궤’다. 1866년 강화도에서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군대가 276권의 의궤를 포함해 359점의 유물을 훔쳐간 것을 1975년 고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폐 서고에서 발견했다. 정부가 테제베 고속철을 도입하는 조건으로 2011년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소유권자는 여전히 프랑스라 ‘반환’이 아닌 ‘영구 대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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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전시관 1층에는 13.5m 높이의 국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있다. 일본으로 밀 반출될 것을 외신기자들이 폭로해 막았다. 지상 3층의 건물 중앙에 층을 모두 비워 설치했다.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2개의 국보 반가사유상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가 수집했다는 고려청자들도 전시되어 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가 부상으로 받았던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도 비치되어 있다.


◇ 성북동과 북촌

 

성북동은 한양 도성 북쪽 동네라는 뜻이다. 복숭아 나무가 많아 ‘도화동’으로도 불리었다. 이곳에는 미술 수집가 간송 전형필이 1938년에 건립한 국내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 ‘간송미술관’이 있다. 김홍도와 신윤복·정선의 화첩, 고려청자, 금동불상 등 6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친 국보급이 수두룩하다. 그가 안동에서 찾은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의 ‘문화보국’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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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의 한옥마을. 일본인들의 거주지 북상을 막기 위해 ‘건축왕’ 정세권이 조선인들에게 보급한 저가형 도시주택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북촌의 도시형 한옥들은 ‘건축왕’ 정세권의 작품이다. 그의 목표는 일본인 땅이 많던 가회동과 익선동, 계동 등 북촌에 많은 도시형 한옥을 지어 조선인에게 분양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남촌에서 점점 북상하는 것을 막고자 연부·월부 판매까지 도입해 싸게 공급했다. 익선동을 시작으로 안국동, 삼청동 등에도 한옥 단지가 만들어져 그가 지은 한옥 수가 6000여 채에 달했다고 한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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