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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영국여자가 멕시코 요리책을 내자 '미친 할머니'란 소리가 들렸다!

[#OTT] 왓챠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 지난해 눈 감은 저자의 인생관 담아

입력 2023-06-28 18:00 | 신문게재 2023-06-2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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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아홉살인 지난해 자택에서 눈 감은 고(故) 다이애나 케네디. 집에서 커피 원두를 볶아서 마실만큼 활기가 넘쳤다.  (사진제공=DOGWOOF)
 

다큐멘터리를 찍었을 당시 한국 나이로 무려 아흔 넷. 거침없이 트럭을 몰며 시골길을 내달리는 할머니가 있다. 수동 기어를 능숙하게 바꾸다가도 조금이라도 늦게가는 운전자를 보면 “내 나이에 길 위에서 죽을 일 있냐?”고 소리 친다. 영국 출신의 다이애나 케네디는 누구나 군에 입대해야 했던 젊은 시절 남에게 경례하기가 죽기보다 싫어 남자들도 기피하는 벌목부대에 자원할 정도로 대범했다.


세계전쟁이 끝난 후 친구들과 떠난 아이티 여행길에서 만난 불꽃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뒤에도 시대를 거스르는 강단이 있었다. 아이 낳기를 거부하고 남편을 따라 멕시코에 머물면서도 내조보다 탐험가의 삶을 택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여행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료를 구해 집에 와서 재현해보며 레시피를 모았다. 당시 멕시코에 오는 전세계 특파원들이 모두 그들 부부의 집에서 만찬을 즐기는 것이 일종의 관례로 자리잡았을 정도였다. 닭과 양에 둘러쌓인 채 3등 버스를 타고 멕시코 곳곳을 돌았던 생생한 경험은 남편의 죽음을 맞으면서 암흑기로 접어든다.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
이 작품의 부제는 원래 ‘Nothing Fancy(별 것 아닌)’이 붙어있지만 그것조차 다이애나가 의도한 반어법이다. 멕시코시티의 근교에서 친환경 집을 짓고 평생 요리법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다이애나의 일상들. (사진제공=DOGWOOF)

 

왓챠 독점공개작인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은 베스트셀러 요리책 작가이자 환경 운동가인 다이애나 케네디의 삶을 반추하지만 그가 어떻게 멕시코 요리에 빠졌는지에 대해선 정작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이 작품의 부제는 원래 ‘Nothing Fancy(별 것 아닌)’이 붙어있지만 그것조차 다이애나가 의도한 반어법으로 멕시코시티의 근교에서 친환경 집을 짓고 평생 요리법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다이애나의 일상들을 담는다. 

멕시코인들보다 더 정석으로, 때론 그들이 모르는 전통요리법을 숙지한 탓에 일각에서는 그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현지의 젊은 요리사들은 면전에서 “이건 우리 할머니 요리법”이라고 강조하지만 다이애나는 그보다 더 강단있는 목소리로 “얘야, 내가 바로 그 할머니와 같이 요리한 사람”이라고 되받아친다.

영국 출신의 평범한 여인이 내놓은 전통 멕시코 요리는 곧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남긴 요리법은 스타 셰프들조차 “멕시코가 다이애나에게 빚을 졌다”고 평가할 정도로 세세하고 또 대중적이다. 그가 방송에 나와 과카몰리를 만들 때면 동네의 아보카도와 토마토가 품절될 정도였다. ‘살림의 신’으로 불린 마샤 스튜어트조차 극 중 다이애나의 책을 들고 사인을 받으며 자신의 롤모델임을 밝힌다. 

사실 그가 책을 쓰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뉴욕 타임즈를 다녔던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뜨고 제대로 된 연금조차 받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하는걸 알게 된 회사 동료가 자신의 섹션에 ‘멕시코 요리에 빠진 영국인’이라는 요리교실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이애나의 작은 주방에 사람들이 몰리고 전국에서 요리교실 제안이 쏟아지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남기기로 결심한다. 당시 멕시코 요리는 기회를 잡기 위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이민자들이 먹던 가난한 음식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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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이 넘게 우정을 나눠오고 있는 현지 요리사는 다이애나에 대해 “그는 멕시코인이 틀림없다”며 요리에 진심인 그의 진심을 한 마디로 정의했다. (사진제공=DOGWOOF)

 

하지만 그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는 방송과 출판계에서 주목을 끌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춘향가를 마스터한 아이슬란드 출신의 무명가수의 등장처럼 생소했던 것. 초보작가였지만 인세는 선불로 받았다. 이왕 책으로 만들기로 한 만큼 그 돈으로 멕시코의 방방곡곡을 돌며 더 많은 요리를 접했다. 그는 “대체적으로 다들 친절했지만 무작정 부엌에 들어가 비결을 묻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면서 “식사를 대접받고 레시피를 얻어도 그것을 집에서 재현하고 계량하는 것. 그것이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은 한 여성의 위대한 성공기 보다는 세상을 오래 산 현인의 일기에 가깝다. 밖에서는 아무리 잘 나가고 유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개인적 노트에는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는 법이다. 다이애나는 “자연이야 말로 후손에게 빌려쓰는 소중한 것” “이 나이에 뚜렷한 주관이 없다면 헛 산 거나 다름없다” “영어에 멋진 형용사가 얼마나 많은데 고작 ‘lovely ,‘great’라는 어린애 같은 표현만 하는 것인지” 일갈한다.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2
자신이 아이를 낳지 않은것에 대해 다이애나는 “누군가를 낳고 기르고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고 회상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편은 그 선택을 평생 존중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제공=DOGWOOF)

 

자신의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가 비위를 맞추려고 아가씨를 뜻하는 ‘Girl’이라는 표현을 쓰자 “제발 예의를 갖춰 ‘Lady’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고 피로를 풀길 원하며 ‘차를 만들어주겠다’는 손녀뻘 후배 요리사에게 전하는 “절대 영국인 앞에서 ‘Tea’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위트 넘치는 조언은 덤이다.

시종일관 깐깐하고, 한편으로는 불만 많고 좋게는 할 말은 다 하는 할머니의 강단에 매료된다. 자애롭고 희생적인 할머니 요리사를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에는 오롯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은 한 인간의 노력과 예민함이 가감없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인생선배의 ‘매운맛’ 조언이 당기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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