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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코멘트] 연극 ‘연안지대’ 김정 연출 “내 이름이 모두의 이름, 내 아버지가 모두의 아버지가 되는 ‘지금’ 여정”

입력 2024-05-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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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지대 김정 연출
연극 ‘연안지대’ 김정 연출(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전쟁이나 어떤 거대한 재난 혹은 폭력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그 실체들이든 이미지들이든 사라져가잖아요.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했을 때 벽에 새겨지지도 않은 채 없어져 버린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지점에서 ‘내가 살아 있었다’ ‘내가 사람이었다’ ‘내가 존재했었다’고 이 문화 혹은 사회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이름 아닌가 싶어요.”

연극 ‘연안지대’(6월 14~30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의 김정 연출은 극 중 ‘이름’의 상징성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는 “아무리 강하고 약한 인간이라도 모두에게 남는 것은 결국 이름뿐”이라며 “그 이름들이 서서히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고 또 다른 희생자들이 그 이름을 밀어내곤 한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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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안지대’ 연습 장면(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이 극에서는 조제핀(조한나)으로 대표되는, (떠돌며 전화번호부에 사라져버린 이름을 적고 부르며) 이름을 간직하려는 의지를 가진 혹은 누군가를 잃어버린 사람들로 인해 호명되어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원작에 있는 이름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외워서 부르고 있죠. 그것이 멀리서부터 누군가에게 불려져 무대로 찾아왔을 때 주는 이상한 소름돋음이 있더라고요.”

이어 “그 부분들이 작가의 머릿속에서 써낸 게 아니라 주변 사회에서의 조각들을 가지고 와 모든 배우들과 토론하고 같이 만드는 작업 과정에서 나온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라고 말을 보탰다.

연극 ‘연안지대’는 ‘화염’ ‘숲’ ‘하늘’로 이어지는 와즈디 무아와드(Wajdi Mouawad) 전쟁 4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이 4부작 중 ‘화염’은 연극으로,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의 영화로 소개됐던 ‘그을린 사랑’의 원작이기도 하다.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_연안지대_포스터
연극 ‘연안지대’ 포스터(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와즈디 무아와드는 레바논 태생의 캐나다 극작가로 그 스스로가 레바논 내전으로 프랑스, 캐나다 등을 떠돌며 겪었던 전쟁의 상흔들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들로 주목받았다.

‘연안지대’ 역시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스마일(윤상화)의 죽음, 그 아버지의 시신을 묻을 땅을 찾아 떠난 아들 윌프리드(이승우)의 여정을 따른다.

“극 중 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아이 아메(이미숙)가 ‘어차피 그런 것들은 다 잊혀지고 우리 이름까지도 다 불태워질 것’이라면서 무너지는 장면이 있어요. 한데 모여 떠돌아다니는 아이들도 결국은 자신있어서가 아니라 겁이 나기 때문에, 언젠가는 본인들도 부모들, 친구들처럼 사라져 버릴 거기 때문에 붙드는 것 같아요.”

그 여정 중 마주하는 전쟁의 참상, 전쟁에 내몰린 이들의 상실감과 죄책감, 죽은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진심 등으로 상처 받은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위안받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사실 모여있다고는 하지만 이들도 폭탄 한번 터지면 끝나요. 오히려 그렇게 소란스럽게 모여 다니다 보면 이 사회에서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잖아요. 그렇게 한치 앞도 모르는 아이들, 가장 약한 존재들이 뭉쳐 다니며 아버지가 묻힐 땅을 찾는 여정에서 성장하는 이야기 같아요. 그래서 놀랍죠. 굉장히 현재성이 느껴진달까요.”

존재조차 희미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 장례를 치르겠다고 길을 떠난 윌프리드의 개인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그 여정 중에 만나는 엄마 잔(최나라)과 아버지 이스마일의 사랑, 엄마의 친척들과 영화감독(강신구), 저마다의 사연들로 몰려 다니는 조제핀, 아메, 시몬(윤현길), 사베(공지수), 마시(정연주) 등을 통해 전쟁의 참상, 사회적 문제를 아우르다 또 다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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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안지대’ 연습 장면(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이 여정에 대해 김정 연출은 “로드무비라는 것은 뭘 잃은 채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은 혹은 내 한계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경험들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며 “심지어 좋은 곳으로의 여행이 아닌, 척박하고 파괴되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아주 공포스러운 곳으로 가는 윌프리드가 죽어서야 만난 아버지를 절대로 놓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배우(이승우)랑 상의 끝에 (아머지 이스마일의 시체 더미를) 내려놓지 말자고 했어요. 한번 안은 아버지를 내려놓지 않는 상징이 굉장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렇게 품에 안았던 더미를 풀어헤칠 때야 문드러진 존재로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그제야 아버지를 만져주는 아들의 행위가 굉장히 중요했죠.”

김 연출은 “우리나라 장례 문화라는 게 사람을 보내는 느낌이 들지 않는, 되게 처참하다는 생각을 한다”며 “결국 저 외롭고 쓸쓸하고 조막만해져 문드러져 버린 존재를 눈물로, 노래로, 울음으로 혹은 외침으로 보내주는 이 행위 자체가 이 연극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을 보탰다. 

 

연극 연안지대
연극 ‘연안지대’ 연습 장면(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더불어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치러야할 장례가 얼마나 많은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결국 (이스마일의 시체를 감싼) 이 더미 자체가 모두의 아버지가 돼 가는 과정이거든요. 처음엔 윌프레드의 아버지였지만 아이들이 저마다의 상처를 밖으로 내놓는 순간부터 개인의 아버지가 아닌 모두의 아버지죠.”

이어 “연습은 뼈로 하고 있지만 실제 무대에서는 문드러진 어떤 상태, 누구든 죽으면 그렇게 될 말라붙은 미라 같은 형태의 소품이 등장할 것”이라 귀띔했다.

연습실에서 활용하고 있는 전신 해골이든, 실제 무대에 올려질 미라 형태의 소품이든 누군가로 특정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엄청 고민을 했어요. 그냥 더미로 충분한가, 사람으로 할까…결국 그 더미를 풀어헤쳤을 때 실체가 나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번거롭고 어려울 수도, 다소 충격적일 수는 있죠. 하지만 공격적이고 그로테스크하더라도 그건 실체이기 때문에 극 진행과정에서 접한 수많은 증언들로 흔들리는 관객들을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겠다 싶었죠.”

그리곤 “거기서부터 윌프리드는 개인 윌프리드가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을 장례치러주고 대신 울어주는 어떤 존재”라며 “그 여정을 통해 심플하고 원시적인 힘이 있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개인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나약한가,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보호해야 되는가를 두고 우리는 계속 싸워 왔어요.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런 싸움이 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신 분들, 희생자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 분들을 과거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와서 배우들과 스태프들, 심지어 이 공연을 보러오신 관객분들 앞에서 장례를 치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러 사람의 상징화가 아니라 눈 앞에 실존하는 어떤 앙상한 존재의 장례요.”

연극 ‘연안지대’ 연습 장면(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연극 ‘연안지대’ 출연진과 김정 연출(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이어 “그런 면에서 와즈디 무아와드도 이 작품을 쓴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밝힌 김정 연출은 “우리의 아픔을 대신 느껴주고 누군가는 객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마음 아파 하는 자체가 우리가 강렬하게 링크돼 있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저마다 떠올리는 사람도 다 다를 거예요. 각자의 유전자, 시선 안에서 저마다의 시신을 안고 장례를 치러주는 그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회적인 폭력, 재난 혹은 전쟁이라는 것이 왜 불필요하고 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결국 단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가, 그 한 사람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중요한가인 것 같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말로서, 이성으로, 논리로서, 구조로서 그런 얘기를 하거나 감각하기 어려운 세상”이라며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 눈앞에 실제로 들이밀어서 이렇게 나약해진 존재가 얼마나 귀중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일깨우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세종문화회관] 극단_연안지대_연습실공개_0528 (6)
연극 ‘연안지대’ 연습 장면(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이스마일은 외롭디 외롭고 초라한 삶을 대표하는 개인이에요. 어쩌면 완전히 구석진 데 존재했다 사라져간 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죠. 영웅적인 서사가 아니에요. 홀로 슬픔 속에 떠돌아다니다 외롭게 벤치에 앉아서 똥오줌을 지리고 죽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얘기죠. 그런 인물, 가장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삶을 가장 소중하게 장례치러주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는 어쩌면 길고도 긴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이태원 참사, 어지럽고 첨예한 갈등, 갈라치기와 가짜뉴스가 판치는 사회상 등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지금에 절실하게 필요한 여정인지도 모른다.

“모든 이슈들이 들끓고 있는 이 한국 사회, 서울 한복판에서 개인의 장례를 치른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그리고 연극의 방식으로,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인 누군가의 눈물로, 외침으로, 비명으로 한다는 것이 너무 중요하죠. 저희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인 것 같아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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