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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불면증에 걸린 현대인, '막스 리히터'로 치유되다

[권익도 White Cube]

입력 2015-10-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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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리히터
런던 ‘웰컴콜렉션’에서는 지난달 26일 막스 리히터의 연주회가 열렸다.(출처: 막스 리히터 트위터)

 

어제도 새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잠이 안 올까봐 저녁 9시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에 베개를 끌어안고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소용없었다. 머릿속은 정리되지 못한 고민의 조각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돈, 친구와의 다툼, 연인과의 이별, 1년 새 건강이 악화된 부모님, 이런 내 속도 모른 채 새벽 중에도 텔레그램으로 일거리를 툭툭 던져대는 빌어먹을 팀장까지. 


허브차도 마셔보고 라벤더향 오일도 베개에 묻혀 봤지만 모두 헛짓거리였다. 최근엔 고전음악이 수면에 좋다길래 조금 들어보기도 했지만 이 역시 그다지. 잠이 올만 하면 현악기 소리는 왜 그렇게 크고 퍼커션 소리는 왜 그렇게 역동적으로 들리던지. 이젠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어둠과 싸워야 하는 내 자신이 죽도록 싫어질 지경이다. 차라리 내가 소돔이나 고모라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죄악을 저지르기라도 했다면 ‘죄값을 달게 받는구나’하고 단념이라도 하며 살텐데. 

 

막스리히터
독일 클래식 작곡가 막스 리히터(출처: 막스리히터 공식 웹사이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늘은 독일의 클래식 작곡가라는 막스 리히터의 음악 감상회에 가보기로 했다. ‘광적인 현실에서 잠 못 드는 현대인, 그들을 위한 자장가.’ 제목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마치 내 얘긴데”하는 그런. 밤마다 고통에 호소하는 내 전화를 불평불만 없이 받아주던 친구가 툭 건네 준 초대권 한 장. 그리고 “가면 아주 특별한 일이 펼쳐질 거야”라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 그래, 수면제에 의존하는 것보단 낫겠지. 한번 가보자.


장소는 런던의 의학박물관 ‘웰컴컬렉션(Wellcome Collection)’. 이곳은 매번 의학과 예술을 연결 짓는 흥미로운 전시를 열기로 유명하다. 웰컴컬렉션에 도착하자마자 도슨트(박물관 미술관의 전시 해설을 담당하는 자원봉사)의 안내를 받아 음악회가 열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책꽂이들이 즐비한 중간 중간엔 의학박물관답게 외과수술용 도구, 삼각 플라스크들이 질서 있게 정렬돼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파란 침낭이 있는 간이침대 12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도슨트는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릴 적 부모님 곁에서 동화를 듣다 편안하게 잠든 날이 생각날 겁니다. 파자마 차림으로 갈아입으시고 나오시면 멋진 꿈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연주
‘웰컴콜렉션’에서 리허설 하고 있는 막스 리히터와 연주자들(출처: 막스 리히터 트위터)

 

옷을 갈아입고 간이침대에 누워 10분쯤 지났을 때였나. 막스 리히터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고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 묵묵히 앉았다. 곧이어 옆에 설치된 신시사이저, 첼로, 바이올린 좌석에도 연주자들이 앉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6m 정도 떨어진 곳. 그곳은 마치 먼 항해를 앞두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여객선의 조타석과도 같았다.

소프트한 코드로 진행되는 피아노 소리로 시작, 첼로의 깊으면서도 아름다운 현의 울림이 뒤섞이면서 포근한 공기가 방안에 드리워졌다. 그렇게 리히터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노란 조명 속에서 악보를 보며 승객들을 위한 ‘꿈의 항해’를 시작했다.

나를 포함, 주변에 실험에 참가한 친구들은 모두 불면증이 있는 사람들이라 처음엔 잠에 들지 못했다. 연주가 시작되고 30분은 그저 꼿꼿이 앉아 리히터의 연주 모습만 바라봤다. 검은 폴로넥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무척 단정해 보였고 리히터는 오로지 연주에 집중했다. 40분이 지났을 무렵에는 소프라노가 나타나 천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모든 이들은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리히터
막스 리히터의 ‘슬립(Sleep)’ 앨범 재킷

 

그래서 콘서트 와중에 잠을 자긴 잤냐고? 점차 부드러운 음악의 반복적인 패턴이 계속됨이 느껴졌다. 큰 파도 물결이 나를 한순간에 씻어 내려가듯. 항상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감고 몽상과 싸움에 번번이 지던 나는 어느새 용감하게 베개를 집어 들었고 이내 몸을 수그렸다.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한 여성의 사근사근한 숨소리가 들리면서 살짝 다시 의식이 돌아온다. 실눈을 뜨고 보니 모두가 잠들고 있다. 손으로 숫자를 세다 태아처럼 잠들어버린 한 소년, 요가 포즈로 손을 가슴 쪽으로 모으고 잠든 여성, 엎드려서 코를 박은 채 자고 있는 남성. 모습도 제 각각이다.

아름다운 선율은 머릿속에서 춤을 췄다. 불면증의 백색 섬광이 다가올 때마다 리히터는 거친 파도를 온 힘으로 받아내는 선장처럼 연주했다. 눈이 점점 무거워졌고 이윽고 내 머릿속도 검은 그림자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천둥 같은 박수 소리에 눈이 떠졌다. 눈을 비비고 보니 리히터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8시간 동안 리히터는 ‘슬립(Sleep)’이란 한 곡을 연주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얼마나 빠르고 광적으로 돌아가는지, 우리에게 얼마나 쉴 틈을 안주는지를 고민하다 이 곡을 만들었다고 얘기했다. 실제로 신경과학자인 데이비드 이글먼과 함께 인간의 뇌와 수면 사이클을 총체적으로 분석하며 음악을 만들었다는 말에 놀랍기도.

어쨌든 그렇게 치유의 과정은 끝났다. 그리고 리히터는 다시 1시간짜리의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리히터의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빠른 세상의 속도를 이기며 ‘느린 공간’으로 접속했고 무거웠던 고민의 짐짝을 하나 둘 내려놨다.마음이 요동치던 날들이여 안녕. 이젠 평화가 오리니.

권익도 기자 kid@viva100.com

 

  

※ 이 기사는 BBC의 리포터인 엠마-제인 커비의 글에 제 시각을 덧입혀 스토리텔링 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저처럼 여러 걱정으로 잠이 안 오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아이플레이어(iplayer) 라디오 앱을 다운받고 나서 영국 BBC방송의 라디오 3채널에 접속하면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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