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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 그에게도 봄날이 온 것인가

[권익도의 White Cube] 데미안 허스트, '로맨티스트'로 변하다

입력 2015-02-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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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기자의 ‘White Cube’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의성 있으면서 트랜디한 음악, 영화, 미술 등 글로벌 문화 관련 소재들을 미술관에 전시하듯 걸어놓자는 취지로 기획했습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상징인 네모난 흰 벽 ‘화이트 큐브’를 콘셉트로 기자 1인이 작품이나 사진에 대한 분석을 하고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직접 큐레이팅 합니다.

 

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 속의 불가능한 물리적 죽음
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1991

 


포름알데히드, 수술용 도구, 알약, 죽은 소와 상어. 남들과는 달라도 ‘유독’ 다른 재료를 자신의 작품 도구로 쓰는 데미안 허스트는 ‘현대미술계의 악동(enfant terrible)’이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엽기적인 작품들로 관람객에게 충격을 줬던 허스트는 작품으로 철학하며 ‘죽음과 삶 사이의 줄다리기’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던져왔다. 그랬던 허스트가 달라졌다.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작품 주제에 상어 대신 사랑을 등장시킨 것이다. 훗날 그의 시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될지도 모를 일이며 세계 미술사적으로는 현대 미술의 메카인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도전장을 들이미는 서막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곧 죽음”

  

“나는 내가 피할 수 없는 것에 정면으로 돌파하라고 배웠다. 죽음이 그 중 하나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회는 어리석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이 영원히 피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느끼는 것과 같다.” -데미안 허스트 

  

 

천년
천년(A Thousand Years), 1990

 


포름 알데히드가 가득 찬 유리 진열장 속에 매달린 죽은 상어. 모터가 달린 상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물 속을 앞 뒤로 유영한다.

 

2개의 공간으로 나뉜 유리관 속에 한 쪽은 죽은 소의 머리를, 한쪽은 구더기 상자를. 구더기는 파리로 자라 소의 머리를 먹으러 간다. 그러나 소머리 위에 설치된 전기장치로 죽고. 다른 파리들은 소머리 위에 알을 낳는다. 알 속에서 부화한 구더기는 파리가 되어 또 다시 죽고. 

 

허스트의 작품들처럼 삶이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일까. 삶이란 곧 죽음이고 시작은 곧 끝이다. 들국화의 전인권이 이 작품들을 본다면 죽기 직전까지 ‘돌고, 돌고, 돌고’를 열창할 것만 같다. 작품들은 이처럼 죽음이라는 관념적인 의미를 소의 머리로 환원시켰다. 허스트는 소의 머리와 상어를 미술관에 던지며 영원히 반대일 것 같은 두 개념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던진다. 그리고 관람객들은 결국 둘 사이 갈림길에서 ‘인생’이라는 교집합을 발견하게 된다. 



◇정말 상어 대신 사랑을 택했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며 공포로 가득 찬 세상에 미약하나마 해독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데미안 허스트 

작품2
러브유포에버(♡YU 4 EVA), 2015

 


허스트가 변했다? 포름알데히드를 매만지던 예술가가 하트 모형의 조각상을 만지작거리며 심지어 전시 이름까지 ‘러브(LOVE)’라고 짓다니. 그의 열혈 팬들이라면 서운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스트는 지난 9일~21일 영국 런던 폴 스토퍼 갤러리의 팝업 전시에서 하트 속에 나비가 들어있는 프린트 몇 장과 ‘러브유포에버’ 라고 새겨진 하트 모양의 조각품을 선보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도를 한 계기는 무엇일까.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데미안 허스트가 지난해 여자친구였던 23살의 스타일리스트 록시 나포시와 열정적인 사랑을 한 후 결별한 것이 그의 예술적 관점을 바꾼 계기가 됐을 거라고 분석했다.

물론 그의 주제는 바뀌었다. 그렇다고 그가 변절한 것일까. 그의 지난 작품을 면밀하게 관찰하듯 다시 심사숙고해보자. 그에게 애초부터 경계란 없었다. 주제는 동일해 보일지라도 전달 방식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했다.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 그리고 철학이란 연장선 속에 사랑이라는 새로움도 있었을 것이다. 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변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점이 변한 것일 지도 모른다. 비록 이후 세대가 20세기 미술을 지배한 파블로 피카소처럼 이 시기를 데미안 허스트의 ‘장밋빛 시대’라고 규정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브릿지경제 = 권익도 기자 kid@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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