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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 발간

인천대 독립운동연구소 총서 4호(통권8권)간행

입력 2024-08-1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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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 이갑성 논문집
국립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가 총서 4호(통권 8권)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표지. 인천대 제공
광복절 79주년을 맞아 국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가 총서 4호(통권 8권)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을 출간했다.

13일 인천대에 따르면 이 책은 2006년 12월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에 김창수(동국대)·유준기(총신대) 교수가 쓴 논문, 지난해 8월‘민족대표 硏堂 李甲成 추모 학술회의’에서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이태룡(국립인천대)·허동현(경희대) 3인이 쓴 논문을 화보와 함께 엮었다.

최근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따른 ‘친일 문제’와 맞물려 사회적 관심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논문에서 연당은 1919년 2월 경성의 학생대표를 규합하고, 종교 지도자들과 연계해 마침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선언서’를 선포했다.

이들은 경성뿐만 아니라 함남 함흥, 경북 대구, 경남 김해·마산, 전북 군산 등지에도 학생을 보내‘선언서’를 배부해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후 붙잡혀 1922년 5월까지 3년여 옥고를 겪었다.

아울러 1924년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강연하다가 또 붙잡혀 2년(1928-1930), 신간회 간사로 활동하다 6개월(1931) 고초를 겪은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제중약방(濟衆藥房)’을 경영하다, 일제 관헌에 붙잡혀 1년(1937-1938), 흥업구락부 활동으로 7개월(1940),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한 여러 혐의로 11개월(1941), 8개월(1942), 4개월(1943), 3개월(1945) 등 9년여 동안 경찰서와 감옥(형무소 전신)·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은 사실을 규명했다.

광복 후 연당은 초대 민의원과 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광복회(光復會)’ 초대 회장을 거쳐 제2대 회장에 당선된 직후 난데없는‘친일 밀정설’에 휩싸였는데, 결국 신문에 허위광고를 낸 자가 명예훼손죄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고 마무리됐다.

그런데, 1981년 연당이 작고한 직후 잡지에 거짓으로 포장된 내용이 다시 실림으로써 연당을 친일 밀정설에 빠지게해 광복회와 학자들은 진실 규명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가 근무했던 경성공업사는 일부에서 주장하듯 일본의 군수공장이 아니고, 미국인 모리스(J.H.Morris)가 사장으로 자동차와 그 부품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였고, 연당이 1922년 5월 출옥한 후 1924년까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의 촉탁으로 활동했다는 설은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탑재된 「조선총독부 직원록」의 ‘촉탁 관련자 명단’에 李甲成이 없어 진실이 아니었다.

연당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샤페이루(霞飛路)에서 경영하던 ‘제중약방’은 「上海韓聞」(한국독립당 기관지) 창간호(1932.01.04) ‘근하신년’란에 ‘濟衆藥房 李甲成’이란 기사가 나와 있고, 김구·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머무는 곳이었음이 밝혀졌다.

더구나 1880년대부터 1910년까지 제적부(호적부) 출생년에 ‘開國’·‘建陽’·‘光武’의 펜글씨로 적히지 않고, ‘明治’·‘檀紀’ 도장을 찍은 채, 원본에도 없는 창씨개명을 크게 적어놓았다.

明治·大正·昭和는 출생년이 일제강점기이고, 단기는 광복 후부터 1961년까지 사용했는데, 남자가 분가(分家)하거나 여자가 출가(出嫁)한 경우에도 그대로 옮겨 적었다.

1880년대 출생한 자의 제적부(호적부)에 명치·단기를 기재한 것은 명백히 날조된 것임을 밝힌 것 등은 광복회와 학자들의 노력으로 연당에게 들씌워진 친일 밀정설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한갓 허구이고, 낭설임을 입증한 것이었다.

이에 국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연당 이갑성 선생의 행적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은 한 사람의 명예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대표 33인 전체의 명예에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해 주요 논문 5편을 묶어 총서로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을 엮은 이태룡 박사는 “1919년 3월 1일 「선언서」가 나오고, 종교계 지도자뿐만 아니라 학생대표를 규합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메아리치게 한 공적이 가장 큰 분은 이갑성 지사인데, 광고나 기사 형식을 빌려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오히려 “친일 밀정”이라는 누명을 들씌운 것은 매우 큰 죄악”이라며, 이후에도 논문이나 단행본에 독립유공자에 대한 거짓 내용이 있는 경우 이를 밝혀나가겠다고 밝혔다.

인천= 이춘만 기자 lcm9504@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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