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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칼럼] 잠재의식의 쓸모

입력 2024-06-12 14:02 | 신문게재 2024-06-1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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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래 부시기획 부사장,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전화신호음이 공연장의 정적을 깨며 울려퍼졌다. 지휘자 정명훈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호음의 멜로디를 따서 피아노를 연주한 뒤 ‘여보세요?’ 라는 조크까지 더했다. 관객들은 긴장을 풀고 박수로 화답했다. 돌발 상황을 여유롭게 대처한 마에스트로의 임기응변은 유연한 사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축적된 경험이 지혜와 연륜으로 승화된 장면이었다. 반대로 경험이 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선입견으로 굳어져 고정관념으로 고착될 때다. 눈앞에 펼쳐진 문제를 맥락을 전환시켜 해결하고 긍정적인 결과로 연결시키는 발상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사소하고 비중없어 보이는 일상의 순간을 존중해라. 어디서 본듯한 기시감의 정체는 바로 그들이다. 지난 겨울 서귀포 기당 박물관에서 그림을 보다 난데없이 칠곡 할매들의 시가 떠올랐다. 황금빛 이어도를 꿈꾸던 변시지의 작품 세계가 만고풍상을 겪으며 다다른 할머니들의 맑고 투명한 시상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3월에 막을 내린 구본창의 사진전시에서도 매순간의 관찰력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선정하는 작가의 창작 습관을 발견했다. 말년에 이르러 백자에 관심을 기울였던 구본창은 명암을 입힌 백자를 찍다 초승달에서 상현달로 차오르다 보름달이 되고 다시 하현달과 그믐달로 이지러지는 달의 생사소멸이 떠올랐다. 그의 삶어디쯤에 존재했을 달과 백자가 만난 것이다. 그는 거리에서 아이디어의 원천을 얻는 미행자(美行者)였다. 망연히 이 작품을 감상하던 어느 할머니의 베레모에서 보름달이 겹쳐진 기억은 내 속으로 들어와 무언가의 연결고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속초의 돼지구이식당 ‘달빛돈가’에서 만난 젊은 주인은 고기를 굽고 사람을 쓰는 일터가 인생의 도장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자 어릴적 자전거를 배웠을 때가 떠올랐다. 자전거 운전은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힘껏 페달을 밟아 자전거 속도가 무게를 이겨내야 앞으로 나간다는 사실은 학교 운동장에 쓰러지고 무릎이 까지면서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했던 것이다. 위나라 요리사 포정(?丁)이 눈을 감고도 소의 뼈와 살을 분리할 수 있었던 것도 9년 동안 몸의 감각으로 익힌 공부 때문이란 고사도 동시에 떠올랐는데 이것도 그 고사를 접했을 때의 기억을 머리속 한켠 어디에 깊게 비축해 둔 때문일 것이다.

실개천이 흘러 바다가 된다. 삶의 편린들이 모여 자신이 된다. 본능과 직관도 기억의 부산물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도 어디서 본 장면의 퇴적물이다. 그러니 일상의 무의식을 관리해라.전시회의 벽보나 지하철의 싯구는 시대의 시선이고 발상력의 어장이다. 그것들을 블로그와 유투브에 부지런히 옮겨보라. 내 경우도 그랬다. 그들을 다듬어 칼럼을 내고 책을 역었다. 대학과 기업의 강의록도 그들이다. 가속도의 시대, 마케팅과 대중문화는 일상이 선생이고 거리가 도서관이다. 오늘의 사건이 오늘의 아이디어다. 누군가의 책, 노래, 그림, 영화, 패션,취향을 마주치면 휘발시키지 말고 차곡차곡 쌓아 당신의 일부에 저장해라. 가능하면 품격있는 것들로 채우기 바란다. 그것들이 모여 당신이 될테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듣는 노래 한 곡이, 주말에 보는 영화 한편이 당신의 무의식속으로 들어가서 모년모월모시에 유레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정명훈이 그랬듯이 말이다.

 

김시래 부시기획 부사장,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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