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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인조와 소현세자, 아들을 질투한 비정한 아버지

입력 2016-06-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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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는 파주 장릉(사적 제203호)을 제향일인 17일부터 일반에 무료로 시범 개방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공개제한지역으로 보존되어 왔던 곳이죠. 파주 장릉은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재위 1623~1649)와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가 함께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인조는 어떤 임금이었을까요?

인조 임금은 1623년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29세에 왕위에 올라 26년 2개월의 재위 기간을 채웠습니다.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 두 차례의 호란과 삼전도에서 청군에 항복하는 등 굴곡 많은 삶을 견뎠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탓일까요, 피해의식이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왕의 자리에 앉은 모든 임금이 힘들겠지만 인조의 상황은 조금 남달랐는데요. 아들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내통하며 차기 임금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의심을 해 마음 편히 잠들 날이 없었죠. 때문에 아들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기도 하고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전쟁에서 패한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을 증명하기 위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을 인질로 보내게 되는데요.

소현세자는 애초에 인질로 붙잡혀 갔지만 청나라 인사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잘’ 적응 하게 됩니다. 더욱이 공녀(제물로 팔려간 조선 여인)들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며 백성의 신망도 두텁게 쌓았죠.

인조는 불안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인조는 아들을 질투했죠. 어느 서적에서는 청나라에 있던 소현 세자가 서양 물건을 가지고 귀국하자 얼굴에 벼루를 던져 크게 다치게 했다고 쓰여있기도 합니다.

조선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독살의 중심에 인조가 있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퍼졌지만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닙니다.

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사망사유로 ‘약물중독이 의심된다’고 적혔고, 사망 당일 기록에는 ‘의관의 오진으로 사망했다’고 적혔죠. 오진한 의관은 처형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지만 인조는 전혀 죄를 묻지 않았죠.

또한 인조는 ‘원손(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대군(봉림대군)을 후사로 삼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소현 세자가 죽은 뒤에도 인조의 분노는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아들에 대한 분노를 며느리 강씨에게 풀었죠. 자신을 독살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기어이 며느리를 살해하고 손자들까지 유배 보냈습니다.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가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죠.

“병이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마음을 평안히 하고 안정되게 하면 사특함을 제어할 수 있다” -인조-

어렸을 적 튼튼하기로 유명했던 인조, 왕 위에 오른 뒤 심적 부담감이 작용한 탓이었을까요, 늘 병치레를 했는데요. 자신의 죽음을 예측키라도 했던 것인지 인조 26년 4월, 스스로 ‘마음의 병’이라 칭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5월, 붕어했습니다. 40대 중반부터 심화된 스트레스로 인한 패혈증이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암살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조는 정말 비정한 아버지가 맞는 걸까요?

인조는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은 비운의 임금으로 꼽힙니다. 그동안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 비공개 되어있던 잠든 인조의 터전에 이제 후세들이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범개방은 이달 17일부터 시작입니다. ‘왕릉공감-세계유산 조선왕릉 사진전’도 함께 열립니다. 잠들어있는 인조의 터전에 많은 발걸음이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박민지 기자 pmj@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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