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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그라운드] 사진작가 ‘박찬욱의 표정’은 ‘긴장’…고정된, 하지만 자유롭게 만나지고 발견되고 존중되는 ‘너의 표정’

입력 2021-10-0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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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영화감독이 아닌 사진작가로 작품을 선보이는 박찬욱(사진=허미선 기자)

 

“영화 데뷔를 할 때처럼 사진작가로서 정식으로 혼자 하는 전시는 처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저의 표정은 ‘긴장감’이에요.”

‘영화감독’이 아닌 ‘사진작가’로 첫 개인전 ‘너의 표정’(Your Face, 12월 19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점)이 개막하는 1일 박찬욱의 표정을 묻는 질문에 그는 “긴장감”이라고 답했다. 영화 촬영 현장 스케치 혹은 스타 배우들의 얼굴 등이지 않을까 했던 섣부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처음엔 다른 이름을 쓸까도 했어요. 제 사진이라는 사전정보 없이 보여드리면 제 영화를 연관시키지는 않을테니까요. 하지만 제 내면의 생각에는 다르면서도 같은, 영화와 사진이 공존하고 있어요.”


◇사물, 풍경 등과의 지극히 사적인 대화 ‘너의 표정’
 

박잔욱 전시
박찬욱 ‘너의 표정’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보통 ‘표정’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쓰죠. 하지만 제 사진에서 사람은 작거나 안보이거나 신체 일부만 보여요. 잘 관찰하면 주변의 모든 풍경, 사물 등에서도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이 발견될 때가 있거든요. 저와 사물이 일대일로 나누는 아주 사적인 대화죠. 그와 나만 있는 순간을 더 드러내기 위해 전시제목을 ‘너의 표정’이라고 했어요.”

워싱턴 DC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준비하던 대기실 소파의 ‘피곤함’ ‘휴식에 대한 갈망’, 신에게 바치는 공물에 엉뚱하게도 꼬여버린 개미떼를 담은 발리 풍경, 영업 혹은 파티 시작 전 런던 클럽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반짝이는 배경, 웜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여 다른 세계로 이끌 것만 같은 크로아티아의 하늘, 이슬람 유령들이 한데 모여 웅성웅성 소리를 내는 것 같은 모로코 밤 해변의 파라솔 등 박찬욱의 사진에는 무생물의 표정들이 저마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박찬욱
박찬욱 ‘너의 표정’ 중 런던 클럽 풍경. 유리 액자에 투영되는 보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상상력과 감정까지 담는듯 하다(사진=허미선 기자)

 

“제목을 ‘너의 표정’이라고 지은 건 보시는 분들이 아주 사적인 감정을 읽혀드리고 싶어서예요. 그걸 제안하기 위해 초대하는 의미의 제목이죠. 어떤 사람이 사진 속 피사체와 일대일로 마주 서서 ‘너의 생각은, 감정은 이런 것이겠구나’ 각자 상상하실 수 있도록요.”

그룹전이나 상시전시가 아닌 개인전으로는 처음 관람객을 만나는 전시의 제목을 ‘너의 표정’이라고 한 데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박찬욱은 영국 런던의 클럽 풍경을 담은 사진을 예로 들었다.

“런던 클럽의 의자와 테이블과 반짝이는 배경을 찍은 사진에서는 파티의 시작이나 무대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대기 중인 순간을 떠올렸어요. 긴장감이나 동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달래주기도 하는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은 상상을 했죠. 저에겐 들리는 듯했거든요.”


◇계획 없이 찰나에 만나지는 순간들, 고정됐지만 자유로운 역설
 

박찬욱
영화감독이 아닌 사진작가로 작품을 선보이는 박찬욱(사진=허미선 기자)

“사진은 영화와 다르게 단순성 때문에 보는 사람들 마음 속에 일으키는 뭔가가 있어요. 영화는 어느 정도 의도되고 디자인되고 설명이 강하다면 사진은 단일한 이미지 속에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멈춘 프레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는 태도가 필요한 매체같아요.”

라이카, 후지, 핫셀블라드 등 다양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는 박찬욱의 사진들에는 영화 촬영, 영화제, 로케이션 등의 일로 찾은 곳, 여행지, 집, 사무실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만난 자연, 사물 등의 ‘표정’이 담겼다.

“예술가들의 처음 것이 가장 날 것이고 좋은 생각이라는 분들도 있지만 전 반대로 생각해요.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유치하거나 관성적이거나 상투적인 게 많거든요.”

이에 영화 작업에서는 “직관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롯이 심사숙고하고 계산한다” 전한 박찬욱은 “하지만 사진은 반대”라고 밝혔다.

“뭔가를 건져야지 계획하거나 어딘가 가서 조명하고 연출해서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런 모습을 상상하시면 돼요. 카메라를 메고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크게 올려 음악을 들으면서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며 걸어다니다가 찰나에 만나지는, 딱 마주치는 순간을 아무 생각없이 찍어요.”

이어 박찬욱은 “여러 각도에서 찍기도 하지만 하나의 피사체는 두세번 촬영이면 끝난다”며 “물론 그 순간 떠오르는 감상들은 있다”고 덧붙였다.

 

“유령 같은데, 무시무시한데, 웃긴데…촬영하는 동안 떠오르는 감상도 있어요. 찍는 순간의 감정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이죠. 하지만 (결국 사진에 담기는) 그런 감정들은 찍은 사진을 태블릿PC로 옮겨 꼼꼼히 보면서 어떤 걸 보관하고 지울지를 선별할 때 찾아지는 느낌들이에요.”

 

박찬욱
박찬욱 ‘너의 표정’(사진=허미선 기자)

그리곤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커트 안에 긴 대사가 있다면 그걸 하기 직전의 표정”이라며 “편집에서 자르기 쉬운데 자르지 않고 좀더 일찍부터 보기 시작하면 독특하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믿음이 생길 때도 있다”고 부연했다.

“배우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기 전, 혼자서 준비하고 생각하고 감정을 끌어올리는 순간의 표정이 담겨서 재밌을 수도 있죠. 배우도 ‘여긴 편집에서 잘려나갈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 공개됐을 때 ‘나한테 저런 표정이 있나?’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펼쳐지기 전 모습, 그런 것들이 사진에서도 만나지죠.”


박찬욱
박찬욱 ‘너의 표정’ 중 특별한 표정을 한 화장실 풍경(사진=허미선 기자)

◇영화 보다 먼저 만나진 사진


“어려서부터 아마추어 사진가이자 화가였던 아버지의 카메라를 가지고 놀았어요. 처음 찍은 사진도 아버지의 카메라였죠. 영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사진을 먼저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대학에 입학해 사진동아리에서 배우고 열심히 찍었어요. 감독으로서, 영화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있지만 사진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도 따로 가지고 살아왔죠.”

우리가 꽤 유능한 ‘영화감독’으로 알고 있는 ‘설국열차’ ‘아가씨’ ‘스토커’ ‘박쥐’ ‘친절한 금자씨’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박찬욱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털어놓았다.

“영화는 손발이 맞으면 여럿이 함께 해서 행복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한없이 힘들어요. 저는 여러 사람 의견을 존중해 취합하고 방향을 정해 끌고 가는 리더십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서 영화 일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예 겁먹고 영화를 포기하기도 했었어요. 하고 싶었지만 영화학과를 못간 이유기도 하고 늘 한 사람과만 하는 이유기도 하죠. 새로운 사람과 일하는 건 물론 늘 하던 사람과도 새로운 일을 하면 또 어려워요. 의견 차이도 있고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제가 상처를 줄 때도 있죠.”

이어 박찬욱은 “게다가 영화는 몇십억, 몇백억이라는 큰 돈이 든다. 남의 돈을 쓴다는 게 무서운 일”이라며 “그 생각을 하면 잠을 못잔다”거 토로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 사진은 홀가분하고 자유롭죠.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저 혼자 책임지고 제 시간만 날리면 되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사진만 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제가 더 즐겁게 작업하는 사진작가라고 할 수 있죠. 그 많은 것들 중 사진 하나를 놓지 못하는 이유기도 해요.”


◇사진하는 재미 ‘만남’ ‘발견’ ‘존중’

박찬욱
영화감독이 아닌 사진작가로 작품을 선보이는 박찬욱(사진=허미선 기자)

 

“영화는 카메라로 계속 흘러가는 시간을 담아요. 프레임이 정해져 있고 사각 스크린으로 보여지지만 카메라의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표현할 수 있죠. 반면 사진은 시간적으로는 한순간이고 공간적으로는 정해진 프레임 뿐이에요.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영화보다 더 큰 상상력을 발휘하게 해요.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영화와는 다른 ‘사진하는 재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박찬욱은 “제 동생(박찬경)과 단편·실험영화 작업들을 계속 하고는 있다. 상업영화와는 다른 세계여서 자유롭고 즐겁게 하는 일”이라면서도 “그럼에도 영상작업은 사진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고정된 이미지라는 것이 가진 매체적 속성은 짧은 영화든 긴 영화든,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움직이는 영상과는 다르거든요. 단편·실험영화를 한다고 해도 사진작업은 저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죠.”

이어 “적어도 이번에 ‘너의 표정’에서 보여드리는 사진과 새로 출간되는 동명의 사진집 작품들에서 저의 영화를 떠올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저 역시 사진을 찍으면서 영화 관련된 것을 떠올리는 일은 없다”고 부연했다.

“인물을 만들어내고 감정을 실현하는 일을 평생 해왔어요. 사진에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감정과는 다른 종류의, 무표정인 얼굴이 가진 것들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무생물에서 찾아낼 수 있는 생명력, 무생물과 제가 만났을 때 생기는 마음 속 감정이요. 만남이고 발견이고 존중이죠.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모두 디지털카메라로 찍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필름카메라 작품도 모아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부산=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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