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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식 기자의 세상만사] 어우동(於于同)

입력 2020-11-2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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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禁) 성인용 소설이나 에로영화(erotic 映畵) 주인공쯤으로 더 잘 알려진 어우동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조선시대 왕족이기도 한 종친(宗親)의 부인으로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문헌상의 본 이름은 박어을우동(朴於乙宇同)이나 호칭하기 쉽게 줄임말로 어우동이라 부르며 충청북도 음성군 음죽현(陰竹縣), 현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 지역이 출생지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외교부에서 승문원, 즉 서고(書庫) 담당관리 박윤창(朴允昌)의 딸로 태어나 요조숙녀(窈窕淑女)로 자란 어우동은 효령대군의 손자 이동(李仝)과 혼인을 했습니다.

종친과 혼인하면 조정으로부터 특혜를 받는데 비록 서자(庶子) 출신이지만 왕족 이동(李仝)의 부인이 되니 정사품(正四品)에 해당하는 혜인(惠人)이라는 봉작(封爵)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회는 유교 성리학을 근본으로 남존여비 사상이 투철하던 시절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관습이 있어 일곱 가지 중 하나라도 어기면 남편이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시부모에게 순종(不順父母) 하지 않고 불효하거나 둘째 아들(無子)을 낳지 못해 대(代)가 끊기게 되었을 때, 셋째 음탕(不貞) 함을 드러내거나 넷째 질투(嫉妬)해서는 안 되며 다섯째 시집오기 전부터 난치병(惡疾)을 앓고 있었거나 여섯째 남의 물건을 훔쳤(竊盜)을 때, 일곱째 말(口說)이 많아도 소박(疏薄)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신접(新接) 살이 단 꿈이 깨기도 전에 내쫓김을 당해야 했던 어우동의 남편이 내세운 명분이야 칠거지악을 들먹이며 아들을 낳지 못하니 가문의 대가 끊길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사실인즉 남편 이동은 장안에서 소문난 연경이라는 기생에게 푹 빠진 나머지 은 세공장(銀細工場) 이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계획적으로 누명을 씌우고 어우동을 쫓아냈던 것입니다.

용재총화라는 문헌에 어우동의 스캔들 사건은 그녀는 집안에 재물이 넉넉하고 자색이 뛰어났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음탕한 여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나이가 젊고 훤칠한 은(銀) 세공장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는데 그녀는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 그릇 만드는 솜씨를 칭찬했습니다.

끝내 젊은 세공장이를 안방으로 끌어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했으나 남편이 자세한 사정을 알게 돼 마침내 내쫓고 말았다.

쫓겨난 뒤에도 어우동의 계집종은 저녁이면 곱게 단장(丹粧) 하고 거리에 나가 미소년을 끌어들여 여주인 방으로 보내고 저 또한 다른 소년을 데려와 함께 자기를 매일 반복했다.

특히 달 밝은 밤이면 끓어오르는 정욕(情慾)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사람에게라도 끌리게 되면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왔다고 수록했습니다.

당시 조선사회의 철저한 남존여비 사상의 관습에 따라 혼기가 된 모든 여성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별개로 오직 부모님이나 집안에서 정해준 생면부지 남성과 혼인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번 혼인한 부부는 이혼을 하려 해도 왕의 윤허가 있어야 가능했던 시대였으니 남편에게 소박을 맞게 되면 출가외인이라는 관습에 친정에서도 버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악습 때문에 여인들은 노동력의 일부분이며 종족 번식 목적의 씨받이 개념이라 할 수 있으니 시가(媤家)로부터 인정받는 가족의 일원이 되기까지는 그 길이 멀고 험했습니다.

혼인 초기의 여인들은 의지하고 기댈 곳이 오직 남편밖에 없는데 바람난 남편으로부터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소박을 당했다면 분방(奔放) 한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어우동은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억울함으로 몸부림치며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젊음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과 한숨으로 기나긴 밤을 지새워야 했을 것입니다.

시서와 가무에 능하고 재색이 뛰어난 어우동은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고 40여 명의 남성들과 자유롭게 연애를 즐겼으며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았다는 기록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사건 내용을 기록하기조차 꺼려 하며 회피할 정도였다니 어우동의 자유로운 연애사건은 폐쇄된 조선 천지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큰 사건이었습니다.

모두가 음탕하고 나쁜 계집이라 손가락질했으니 목숨 걸고 자신만 사랑한다는 남성들 신체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게 했다니 남성들에게 품었던 시원한 복수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본다면 남성우월주의 제도에 정면으로 맞선 도전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자신이 버림받았던 남성들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저질러진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 사회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이유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건국이념에 따라 사회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왕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되었습니다.

12명의 조정 대신 가운데 4명만 극형을 찬성하고 8명이 반대했음에도 여성인 어우동만 사형에 처하고 스캔들에 연루된 남성 관련자들은 경범으로 처벌되며 사건은 종결됩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체포, 90일째인 1480년 10월 18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녀는 악습(惡習)인 남존여비 사상(男尊女卑思想)의 희생양이 아닐까요?

“백마대(白馬臺) 텅 빈지 몇 해나 되었을까? 낙화암(落花岩) 세워져 많은 세월이 흘렀구나. 만약 청산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천고의 흥망(興亡)을 물어 알 수 있을 텐데”.....

어우동이 지은 시(時)로서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인 권응인(權應仁)이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시(詩)들만 모아 1585년에 편찬한 송계만록(松溪漫錄)에 소개되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승식 기자 thankslee57@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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