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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식 기자의 세상만사] 붉은 글씨 충렬비(忠烈碑)

입력 2020-06-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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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되자 한성을 신도읍(新都邑)으로 정하고 전국팔도에 아홉 개의 도로망을 건설했는데 문경새재(鳥嶺)를 거쳐 가는 길은 1414년 태종 재위 시절에 개통된 관도(官道)입니다.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 사이에 위치한 이 고개를 1451년 문종 때 집필된 고려사지리지(地理志)에 처음 등장하는데 초점(草岾)이라는 명칭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자어로 풀초(草), 고개점(岾)이니 풀이 무성한 고개라는 뜻인데 1486년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에 비로소 조령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기 시작, 지금까지 그렇게 불러지고 있습니다.

당시에 영남지방과 경기, 충청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로서 근간에 추풍령을 지나가는 경부고속화 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로였습니다.

조령(鳥嶺)은 고갯길이 너무 높고 험준하여 하늘을 날던 새도 넘기가 힘들어 쉬어간다는 뜻으로 조령이라 부르기 시작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새재는 조령의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또한 해발 642m 높이에 있는 문경새재는 서울 쪽에서 보면 920m 마역봉과 835m 깃대봉 사이로 난 험준한 고갯길로 관할 행정구역이 문경시이므로 통상 문경새재라고 부릅니다.

1594년 충주출신으로 수문장 신충원(辛忠元)이 건립한 중성(中城)이 제 2관문이며 임진왜란 이후 1708년 남쪽으로 약 3㎞ 떨어진 곳에 건립한 초곡성(草谷城)이 현재 제1관문입니다

제1관문인 초곡성, 즉 주흘관(主屹關)으로 오르다 문경농특산물 직판장과 야외공연장 사이의 우측, 전통방식의 화려하지 않지만 노송에 둘러싸인 듯 비각(碑閣) 하나가 서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비각 안의 비석(碑石)에 새겨진 비문(碑文)으로 대부분 원석에 음각으로 문자만 새기거나 또는 검정색 글씨를 쓰는데 주흘관 아래 세워진 비석은 참 이채롭습니다.

1706년 건립된 비석에 자형이 가장 똑바르다고 알려진 해서체(楷書體)로 신길원현감충렬비(申吉元縣監忠烈碑)라고 음각으로 새긴 글자가 핏빛처럼 붉은색이라 보기에도 섬뜩합니다.

충렬비가 서있는 곳의 행정구역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 340-1번지로 1981년 4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5호에 지정, 이곳으로 옮겨져 경상도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1592년 신길원이 문경현감으로 부임하자 곧바로 임진왜란이 발발, 고시끼니(소서행장)가 이끄는 왜병들이 물밀 듯 밀려와 요즘말로 데프콘 1단계를 발령하는 한편 방어진을 쳤습니다.

문경전투 기록이 현존하지 않지만 임진왜란 발발로 조정에서 순변사(巡邊使)로 파견된 이일(李鎰)이 인근 고을의 군사들을 모아 남진 했으니 문경현에 정규군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문경현 소속 관병들은 모두 합해도 수십여 명에 불과한데다 전투병이라기보다는 요즘 말로 사회적 대민지원 전문 요원들이지만 신길원은 선봉에서서 현을 사수했습니다.

승냥이 떼 같은 왜적들과 전투는 조령으로 물러나 배수진을 쳤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적의 흉탄을 맞아 부상으로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순순히 항복 한다면 목숨은 물론 후한 상을 내리겠다는 왜장의 설득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항거하다 사지를 절단당하는 주검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으니 사월 스무 이렛날입니다.

평안도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宣祖)는 1593년 10월 임진란 종전으로 환궁한 뒤 신길원을 좌승지에 추증,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그 충절을 실어 전국에 선양토록 표창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백년이 지난 1706년 3월 조선 제19대왕 숙종(肅宗)은 신길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충렬비를 세워 당대 문장가 채팽윤이 비문을 짓고 남도익이 글씨를 썼습니다.

어느 때 지금의 문경초등학교 옆으로 신길원의 충렬비가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학교 옆에 세워져 있던 비석을 1998년 문경시가 현 위치에 비각을 건립하고 옮겨 세웠습니다.

1826년 문경현감 홍노영과 지역 유림들이 문경읍 교촌리 문경향교 앞에 충렬사를 건립하고 신길원의 신위를 배향(配享)하여 그의 높은 충절을 기리며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신길원의 생몰년도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미상이며 그의 참전내용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수록, 전해지고 있으나 충렬비 비문이 붉은색 글씨인 까닭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승식 기자 thankslee57@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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