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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뷰] 좀 더 짜야 하는 팔 한쪽을 남겨둔 스웨터처럼…그렇게 또 살아간다, 연극 ‘3월의 눈’

입력 2018-02-1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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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3월의 눈’ 이순 역의 정영숙과 장오 오영수(사진제공=국립극단)

 

‘3월의 눈’(3월 11일까지 명동예술극장)은 흔하다. 극 중 누구도 나쁜 사람은 없다. 오래된, 하지만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져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붐을 탄 집 한채가 가진 것의 전부인 초로의 장오(오영수·오현경, 관람배우 순)는 그마저 손자의 빚 갈이로 내어주고 떠날 채비 중이다.

평생 일군 것을 자녀들을 위해 모두 내어주는 장오의 곁을 지키며 소녀처럼 까르르 거리는 아내 이순(정영숙·손숙)과 볕 좋은 마루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티격태격하다 토라지는가 하면 문짝의 창호지를 새로 바르기도 한다. 배삼식 작가의 장민호·백성희에 대한 헌사 ‘3월의 눈’ 속 풍경은 일상처럼 담담하지만 깊고도 심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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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3월의 눈’ 장오 오영수와 이순 역의 정영숙(사진제공=국립극단)
장오가 떠나는 전날의 밤, 할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는지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 손자도, “할아버지 좋아하시잖아요” 만두를 들이밀며 미안함에 허리를 펴지 못하는 손자며느리 명서(김정은)도 작정하고 나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장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일꾼들을 대동하고 들이닥쳐 마룻바닥부터 뜯어내라 막무가내인 새 집주인 용철(하성광)도 집을 사고 몇 달이고 비워줄 때를 기다린 끝에 내린 결정이니 마냥 나쁘다고만 하기 어렵다.

나이를 먹는 것도, 변화에 순응하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일도 아니다. 그저 일상이다.

아들의 생사도 모른 채 감내하며 지냈을 노부부의 긴 세월,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3월의 눈’처럼 모든 것을 내어준 고독이 장오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도 올라선다.

누구 하나 작정하고 나쁜 사람이 없는데도 먹먹하고 처연한 ‘3월의 눈’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비일비재하다. 열심히 일해도 빚은 줄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스펙을 쌓아도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장오가 집을 비워줌으로서 비로소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된 용철은 돈 벌 생각에 들떠 있지만 그 앞날도 마냥 ‘꽃길’이라 누구도 함부로 장담할 수 없다.

국립극단 극으로는 드물게 무대를 꽉 채운 고즈넉한 한옥이 뜯기는 순간은 앙상해지는 동시에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 순간은 이순이 서툰 손길로 짠, 팔 한쪽을 마저 짜야 하는 빨간 스웨터로 온기를 보태고 돌아서는 장오의 뒤태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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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3월의 눈’(사진제공=국립극단)

 

나이가 들었다고 모든 일이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든 이들이라고 현실을 초월하거나 늘 견고한 존재로 발 딛고 설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사회의 변화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이 시대의 한 가운데서 여전히 세상과 드잡이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위태롭고 고독한 순간들의 잔영과도 같다.

그 묵직한 메시지는 베테랑 배우들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성큼 다가온다. 떠나는 장오에 마지막 술 한잔을 권하는 이는 무슨 사연인지 정신줄을 놓은 황씨(이종무), 바람처럼 찾아와 밥을 얻어 먹고 지친 몸을 뉘이기도 하던 그가 갈 곳도 ‘3월의 눈’처럼 사라졌다.

이제 겨울이 다 갔다 방심하는 사이 찾아오는 꽃샘추위나 3월에 내리는 눈 같은 ‘사건’은 흔해졌다. 3월은 물론 8월의 눈도 놀랄 일이 아니게 된 세상,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연극 ‘3월의 눈’ 속에 시리게도 잔영으로 남은 장오와 이순의 시간도 느리지만 깊게 흘러간다. 좀 더 짜야 하는 팔 한쪽을 남겨둔 새빨간 스웨터처럼.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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