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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더컬처]몰라봐주는 게 최고의 칭찬! 연극 ‘벙커 트릴로지’ 정연

입력 2017-01-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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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배우 정연.(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이번 주는 ‘아가멤논’ 주간이에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전장의 참호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벙커 트릴로지’는 그런 연극이다. 고전 혹은 설화를 바탕으로 한 ‘아가멤논’, ‘모르가나’, ‘맥베스’로 구성된 ‘벙커 트릴로지’는 연습기간 중 2주에 한편씩 완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극 중 크리스틴(아가멤논), 그웬(모르가나), 레이디 맥베스와 릴리(맥베스)로 분하는 솔저4의 정연은 매주 고민거리가 달라진다고 털어놓았다.

“대부분은 공연이 올라가면 문자(대사)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되거든요. 그런데 얘(벙커 트릴로지)는 안그래요. 요즘도 매일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바뀌고 또 바뀌죠.”

대사를 외우고 배우끼리 합을 맞추고 무대에 올리면 안정화로 접어드는 작품들과 달리 ‘벙커 트릴로지’는 매주, 매일, 매순간 변하고 달라지는 마법 같은 연극이다. 무대에 서야 하는 배우들에겐 그야 말로 전쟁만큼이나 치열한 작품이기도 하다.

“가장 많이 바뀐 게 ‘모르가나’예요. 대사가 아니라 뉘앙스, 분위기, 콘셉트 등이 완전 바뀌었죠. 그래도 전 힘들지 않은 게 이미 연습하면서 한번 나왔던 얘기였어요. 그 많던 이야기 중 선택하지 않았던 콘셉트 중 하나였죠. 어사무사했던 것들이 명확해졌어요. 매주 세 작품을 돌아가면서 고민하고 되짚어요. 다음 주엔 또 ‘맥베스’를 고민하고 있겠죠.”

매주 ‘아가멤논’ 주간, ‘모르가나’ 주간, ‘맥베스’ 주간을 보내고 있는 정연은 “어렵지만 마냥 재밌다”고 속살거린다. 



◇“명확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서 마냥 재밌는 ‘모르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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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배우 정연.(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명확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특히 ‘모르가나’가 심하죠.”

‘모르가나’는 영국 켈트신화 속 아더왕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아서(신성민·오종혁)의 연인 그웬, 랜슬롯의 환상 속 그웬(이석준·박훈) 그리고 가웨인(임철수·문태유)이 만난 프랑스 여인으로 모습을 끊임없이 바꿔가야 한다.

“지금 바뀐 연출은 처음부터 모르가나가 존재하는 콘셉트예요. 지금까지는 환상인지 과거인지 실존하는 여자인지 정하기 나름이었어요. 실존일 수도 있고 가웨인이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었죠. 그걸 표현해낼 길이 없어서 힘들었어요. 제가 ‘난 실존이야’ 하고 자신있게 들어간다고 한들, 그만큼 관객들에게도 보여지는가는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래서 혼란스러웠어요.”

그래서 ‘모르가나’ 연습을 가장 먼저 끝내고 ‘아가멤논’, ‘맥베스’ 진도를 나가면서도 끈을 놓지 못했다.

“갑자기 미스코리아처럼 한 바퀴를 돌고 나가는데 나는 지금 누구를 연기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어요. 대본에 지문도 텍스트도 서브텍스트(대사가 내포하고 있는 것들)도 없어요.”

아더가 보는 그웬, 랜스롯이 바라는 그웬, 가웨인이 보는 환상, 특히 가웨인이 보는 여자는 명확한 것이 없다. 왜 그 헛간에 있는지, 가웨인이 ‘프랑스 사람이에요?’라고 물으니 그냥 그렇게 돼버렸지만 진짜 프랑스 여자가 맞는지, ‘노래 잘하시네요’라는 그웬의 한 마디에 아더에 먼저 호감을 느꼈겠구나 가늠할 뿐 앞뒤로 어떤 히스토리도 없다.

“아무 것도 정해진 게 없었어요. 남자가 말하는대로 되는 거예요. 그런 (남자가 말하는 대로) 지문은 없지만 지금 들여다보니 그렇죠. ‘이 사람들이 바라는 게 뭘까’라는 물음으로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면서 ‘모르가나’는 편해졌어요. 어느 면에서는 포기하고 들어갔어요. 이유를 자꾸 따지기 시작하면 한발짝도 뗄 수 없으니 그림으로 가자 했죠. 전쟁 중 남자들의 환상이니까 어떻게 손짓을 하고 어떻게 웃을까,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위로를 줄까…그림으로 봤죠. 어려워도 믿고 가니까 그 나름의 재미가 있더라고요. 명확해진 지금의 버전도 신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림이에요.”


◇앞뒤 온도차가 큰 ‘아가멤논’, 촛불로 평온해진? ‘맥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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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배우 정연.(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아가멤논’은 앞뒤 온도차가 심해요. 여성운동을 하다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며 익숙해지다가 다시 내 정체성을 가지고 떠난다는 게 맥락인데 그 안에 인류애, 부부의 사랑, 모성애 등이 있죠.”

시작과 끝의 감정차가 지독히도 큰 ‘아가멤논’ 역시 한 발짝을 떼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 왔다. 어떻게 이만큼이나 이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할 수가 있는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서였다.

“묻기 시작하니 한도 끝도 없어서 한발짝도 못 떼겠더라고요. 처음부터 이 여자(크리스틴)에게 마음을 너무 많이 주고 따라가기 시작하면 나중에 실망감이 짝이 없겠다 싶었어요. 그럼에도 작가가 놓치지 않았던 건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결국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실이죠.”

그런 정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본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 아이에 대한 모성, 그 시국에 발끈 해보지도 못하고 당하는 순간들…정연은 미리 감정선을 설정하기보다 대본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감정이나 간극의 정도를 정하고 가지 않아도 순간순간 진정성있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간극이 너무 커져 버렸죠. 그래서 훨씬 재밌어요. 세 에피소드가 모두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아가멤논’이 제일 달라요. 상대 배우 따라서, 저의 상태에 따라서. 어느 날은 다시 주체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그렇게 클 수 없다가도 언젠가는 알베르트를 너무 사랑해서 헤어나질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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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트릴로지’ 아가멤논의 크리스틴 정연.(사진제공=아이엠컬처)

 

‘아가멤논’ 주간의 고민은 감정의 문제였다. 감정은 갈수록 깊어가는데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를 성찰하며 묻고 또 물었다.

“이만큼의 감정이 들어왔는데 이게 진짜야? 그 감정이 들어왔다면 어떻게 보여줄거야? 계속 물어요. 그만큼의 감정이 크리스틴으로서의 든 건지 정연인지를 고민하죠. 크리스틴과 제가 다르다고 분리해서 연기하는 건 아니에요. 어차피 크리스틴은 저로부터 출발하니까요. 하지만 크리스틴으로서 다시 한번 감정의 깊이에 대해 고민하죠.”

배우 혹은 인간 정연의 감정인지 크리스틴의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마치 도돌이표처럼 끊임없이 그를 고뇌하게 한다.

“그런 것에 대해서 (이)석준 오빠가 조언을 많이 해주세요. 후배들을 늘 둘러봐 주시죠. ‘크리스틴에게 정말 그런 감정이 들까? 네가 진짜 그런 존재일까?’라고 확인하시고 조언을 주세요. 어떨 때는 대혼란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런 숙제가 너무 재밌어요. ‘맥베스’는 촛불이 있어서 이해가 편했어요. 안그랬으면 엄청 힘들었을 거예요. 지이선 작가는 천재구나 했죠.”

이에 ‘맥베스’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보다 고전적으로 연기할 것인가 였다. 그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어서 다른 시도, 다른 생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은 막공(마지막 공연)까지도 계속될 전망이다.

“‘맥베스’는 고전이니까 고전으로 확 가고 싶었어요. 징그럽게 고전으로 가고 싶었죠. 목소리도 발성도 바꾸고 싶었고…. 제대로 피폐해지고 칼만 안찼다 뿐 혀로 죽여버리는 그런 연기요.”


◇‘카포네 트릴로지’ 경험에도 외로움, “지현이랑 많이 의지하고 배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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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배우 정연.(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여자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서 ‘벙커 트릴로지’는 ‘카포네 트릴로지’에 비해 좀 덜 어려웠어요. ‘카포네’는 세극을 동시에 준비해야하고 각 에피소드에서 다른 역할을 연기해야하는 첫 경험이기도 했지만 남자 캐릭터들 보다 여자 캐릭터들이 정말 힘든 극이었어요. 그나마 ‘벙커’에서는 숨 쉴 구멍이 있어서 분장실에 갈 순간들도 주어지죠.”

‘벙커 트릴로지’의 어려움은 실제 전쟁 중 남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자처럼 느껴지는 외로움이었다.

“크리스틴도 그웬도 릴리도 전쟁이라는 대전제를 많이 생각하고 갈 캐릭터가 아니었어요. 남자 캐릭터들이 우리가 잘 모르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다면 저희(정연과 김지현)는 존재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신에서 신으로 넘어가는 사이에서 나는 레이디맥베스여야 하는지 아니면 릴리여야 하는지, 이 시점에서 릴리는 얼만큼의 충격을 받은 건지…계속 부등호를 고민했어요.”

결국 그 고민을 얘기하고 머리를 맞댈 상대는 같은 역에 더블캐스팅된 김지현이었다. 같은 극단(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소속이기도 한 두 사람은 둘만의 공간에서 연습하고 고민하며 생각을 나눴다.

“레이디맥베스는 시작부터 미쳐서 등장하잖아요. 그러다 갑자기 죄책감에 빠져들기도 하죠. 그 감각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 중간중간을 릴리가 메꾸고 있는데 머리로 잘 버무리고 당위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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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과 ‘벙커 트릴로지’ 솔저4에 더블캐스팅된 김지현.(사진제공=아이엠컬처)

 

‘너무 많이 미쳤어?’ ‘덜 미쳐 보여?’ ‘어떻게 좀 더 미쳐보지’…. 정연 스스로 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평하는 김지현과는 ‘카포네 트릴로지’에 이은 ‘벙커 트릴로지’ 뿐 아니라 ‘풍월주’, ‘올모스트메인’ 등에 더블캐스팅되곤 했다.

“지현이랑 저는 엄청 친한 친구지만 너무 달라요. 지현이가 왜 그런지를 분석하는 스타일이라면 저는 엄청 단순해요. 텍스트(대본), 지금 하는 말을 믿고 일단 해보자 해요. 지현이는 뭔가 묘하고 몽환적인 걸 잘 표현해요. 하지만 전 명확하고 설득력을 확 주는 걸 좋아해서 뉘앙스를 가지고 하는 연기를 잘 못해요. 하지만 분명 그런 연기는 필요하죠. 지현이랑 몇년 있으면서 많이 배웠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 그게 무대에서 너무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거든요. 지현이가 그런 연기를 정말 잘해요. 연습할 때 그래서 좋아요. 해석 자체가 다르고 뉘앙스로 다르다 보니 서로의 다른 매력을 보면서 많이 배우죠.”


◇ 과감하게 “일단 시키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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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배우 정연.(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저는 굉장히 과감한 스타일이에요. 엄청 단순하기도 하죠. 그래서 해결 안되는 부분을 계속 생각하기 보다는 일단 됐어, 여기서 시작해보자 해요. 구르라고 하면 아무 이유 없이 굴러요. 머리로 설득이 안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일단 해보고 되면 되는 거예요. 만약 안되면 왜 이렇지 라고 다시 이성적으로 역행해 생각하죠. 그렇게 몸에 밴 것 같아요. 슬픔과 기쁨 두 개 뿐이던 ‘이분법 연기’에서 그 경계를 오가는 감정들이 이제야 힐끗힐끗 보이기 시작했어요.”

쇼걸임을 명확히 했던 ‘카포네 트릴로지’의 록키, 애교와 사랑스러움을 표현했던 말린, 차가웠던 루시,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상처를 가진 연극 ‘까사 발렌티나’의 리타 등 배우이자 인간 정연이 가진 것을 하나씩 떼서 명확하게 투영시킨 캐릭터들은 매번 다른 사람처럼 인식되곤 한다.

“저 역시 감정의 온도차가 커요. 오랜 친구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모르겠다고 불만이 많아요. 게다가 해가 지날수록 변하고 있죠. 하지만 무대 위에서 내(인간 정연)가 보이는 게 싫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제가 제일 기분이 좋을 때는 저를 몰라볼 때예요. 다른 극의 다른 두 인물을 같은 배우가 연기한 걸 몰라봐주시는 게 제일 큰 칭찬이에요. 저에겐.”

이에 배우 정연에 대한 연출들의 생각이나 평가도 천차만별이다. 섹시하고 모진 풍파를 겪는 등 빨간 옷 입은 여자 캐릭터만 연기하게 되는 때가 있었는가 하면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 대본만을 받던 때도 있었다.

“연출님들이 ‘걔를 쓰겠다고?’ ‘걔가 어울려?’ 만날 이러고 계세요. 그런 걸 보면서 ‘잘하고 있네’ 스스로를 칭찬하죠. 저는 칭찬이 헤퍼요. 특히 제 칭찬은 더 잘하죠. 매 시즌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달라지니 이번엔 또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실까 기대하게 되고 설레고 그래요.”


◇차기작 연극 ‘유도소년’ 그리고 고전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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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배우 정연.(사진=양윤모 기자 yym@viva100.com)

 

‘벙커 트릴로지’를 끝내고는 연극 ‘유도소년’에 출연한다. ‘유도소년’은 1997년을 배경으로 한 청소년들의 성장기다. 슬럼프에 빠진 전북체고 유도부 주장 경찬이 엉뚱한 일에 휘말리는 이야기로 정연은 발랄한 여고생 화영으로 제작사인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10주년 특별공연 무대에 오른다. 


“‘맥베스’를 하면서 셰익스피어 등 고전도 해보고 싶어졌어요. 워낙 소리에도 관심이 많아서 발성과 목소리를 바꾸는 재미도 새삼 느꼈죠. 고전은 재밌지만 어렵죠. 그 어려운 걸 쉽게 ‘가나다’로 풀어서 제 스타일로 보여드리고 싶어졌어요.”

사랑스럽고 화끈하며 신비롭고 센 배우 정연의 2017년은 그렇게 재밌게 진화할 모양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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