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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애를 받아들이자 국회도 나를 받아들였죠"

척수장애 딛고 일어선 정하균 전 국회의원

입력 2014-09-2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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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균
이른 아침 차사고가 났고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바로 병원으로 이송 되었다.

수술 후 깨어나니 몸에 감각이 없다. 진단 결과 목뼈에 금이 갔고 중추신경을 건드렸단다.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나이 29세.이제 막 결혼했고 한 가정의 가장이며 아이도 태어났는데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사고 이후에도 어둠의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인정하기까지 1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도전을 하며 척수협회를 만들고 18대 국회의원, 헌정대상까지 받는다. “재활의 완성은 내가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전 정하균 국회의원, 그가 이뤄 낸 도전 스토리를 들어본다.

“장애가 없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 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습니다.” 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감각 없는 몸을 지탱하고 하루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자신의 몸을 고쳐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국내외 여기 저기를 찾아 다니며 치료도 해 봤다. 소용이 없었다. 결국은 서양의학을 포기하고 한의학을 스스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부하지만 한의학 역시 반응이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고쳐보려고 발 버둥 친지 13년 되던 해. 그는 스스로 그의 몸에 백기를 든다. 새로운 정하균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첫 번째 도전이 시작됐다.

아픈 몸과 싸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썼던 그는 발전된 사회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산적인 일에 안테나를 맞춰 사회복지와 관련한 공부와 활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선천적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이 소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부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2003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를 만든다.

그리고 58개 단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장애인들의 필요사항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시작했고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토론회를 개최하며 세미나도 열었다. 이 내용들을 법으로 어떻게 녹여 낼 수 있을까 많은 전문가들과 장애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가 이뤄졌다. 그는 본인의 실체를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일에 도전했다. 더 이상 잃을게 없었다.

“그냥 열심히 살자. 객사하더라도 억울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전한 그는 “쉽진 않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분주하게 단체를 운영하면서 또 한가지 목표가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척추장애(척추뼈에 문제)는 알아도 척수장애(신경문제)란 말을 모른다는 점과 또 복지부에서 조차 전국에 척수장애가 몇 명인지 집계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척수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 병원을 방문하기 시작한다. 그의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된 것. “척수장애는 후천적으로 생긴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장애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 해요. 설득하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전국 3바퀴를 돈 보람이 있었죠” 그는 어렵게 척수장애인들을 설득시켜 척수장애인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사단법인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또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과천청사까지 전철을 타고 가는 데만 2시간, 그렇게 2년간 공무원 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한 끝에 사단법인을 만들고 그 해 국가 예산을 받게 된다. 드디어 그의 두 번째 도전이 성공했다.

척수장애협회는 기존에 있는 장애인 단체보다 시작은 늦지만 가장 활발하게 또 의미 있게 활동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회에서 강의까지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협회를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후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최고위원직을 수행하며 비례대표로 제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는데 그는 이 시기를 그의 3번째 도전이라고 말한다.

3년 내내 보건복지위원을 맡으면서 복지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그의 노력은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국회 대한민국 헌정대상 수상, 본회의 참석 우수 국회의원 선정 등 수많은 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국회의원으로 있는 동안 장애인 대표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요즘은 행복한 재단을 이끌며 더 소외받는 외로운 사람들, 희귀질환자들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희귀난치환자들에게 의료비를 지원하고 벗이 되어 준다. ‘고통을 잠시라도 잊게 해 주는 일이 행복하다’는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은 없느냐고 물었다. “장애인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할 일 이 많다”며 “다음 도전도 장애인 대표(20대 국회의원 출마)”라고 밝혔다.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은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신감을 보이는 그는 또 다른 도전을 위해 오늘도 바쁘게 움직인다.

노은희 기자 selly215@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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